
도시 한복판에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자. 한 노인이 빗속에서 버스 정류장을 찾아 헤맨다. 그 순간, 도시의 공간지능이 그를 감지한다. 인근 키오스크 화면이 자동으로 밝아지며 큰 글씨로 가까운 정류장을 안내하고, 신호등은 노인의 보행 속도에 맞춰 녹색 불을 7초 더 연장한다. 지하철 역사의 엘리베이터 문은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열려 있다. 어느 공무원도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어떤 신청서도 필요하지 않았다. 도시가 스스로, 조용히, 그를 도운 것이다.
이것은 공상과학이 아니다. 지난 두 편에서 논의한 공간지능과 에이전틱 인공지능(AI)의 철학이 실제 인프라에 구현된 모습이다. 첫 번째 원칙 '맥락 이해'로 도시의 눈과 뇌를 바꿀 수 있다면, 이제 에이전틱 도시를 완성할 나머지 두 원칙이 필요하다. 도시의 '정체성'과 '책임'에 관한 이야기다.
두 번째, '기술 주권(소버린 AI)과 데이터 민주주의의 결합'은 도시의 '정체성'과 '권리'를 규정한다.
한국은 2026년 1월 AI 기본법 시행으로 19개 분산 법안을 하나의 프레임워크로 통합한 세계 최초의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규범적 퍼스트 무버'로의 선언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서울의 교통 신호 알고리즘이 실리콘밸리 빅테크의 블랙박스 안에 있다면, 그 도시는 과연 시민의 도시인가, 플랫폼 기업의 도시인가.
정부는 반도체·데이터센터·K-LLM을 결합한 소버린 AI 전략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이 논의가 도시 단위로 내려오지 못한 채, 시민의 데이터가 낯선 알고리즘에 해석되는 구조는 21세기판 오스만의 파리 재개발과 다를 바 없다. 보스턴, 싱가포르, 바르셀로나가 주목받는 이유는 기술이 앞서서가 아니라, 알고리즘이 시민을 위해 일한다는 '신뢰' 때문이다. 도시 AI가 특정 빅테크의 이윤 논리만 최적화하는 순간, 그 도시는 스마트해질수록 불평등해진다.
세 번째 원칙은 '책임 있는 인프라로서의 안전성'과 '지속 가능성'이다.
AI가 도시의 혈관이 되면 더 조용하고 거대한 위협이 등장한다. 에너지 문제다. 2028년까지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만으로도 연간 160억~330억갤런의 물이 소비될 전망이고, 일부 시설은 10만 가구의 전력을 소비한다. 더 지능적일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역설. 지구를 소진시켜 지능적인 도시를 만드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올해 가장 심각한 사이버 위협이 교통·전력·긴급구조 시스템의 '운영 통제권 상실'에서 비롯될 것이라 경고한다. 규제는 혁신의 브레이크가 아니라 가속 페달이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는 빠른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이다.
대만 가오슝시는 AI 도입으로 사고 대응 시간을 80% 단축했고, 싱가포르는 3D 시뮬레이션으로 바람길과 일조권까지 최적화했다. 그러나 질문해야 할 것은 “도시가 얼마나 빠른가”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 빠른가”다.
우리가 도입하는 AI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효율 지표를 높이기 위한 것인가, 빗속에서 길을 잃은 노인 한 명을 위한 것인가. 그 답이 '스마트시티'와 '에이전틱 도시'를 가를 것이다.
에이전틱 도시의 종착지는 가장 인간적인 '예의(禮儀)'를 갖춘 공간이다. 보행자의 속도에 맞춰 신호를 연장하고 시민의 불편함을 먼저 알아채 조용히 해결하는 '보이지 않는 지능'. 그것이 기술이 지향해야 할 품격이다.
2026년 3월, 대한민국의 과제는 칩 경쟁도 로봇 생산 순위도 아니다. 사람을 배려하는 공간지능의 철학을 도시 문명의 새로운 표준으로 설계하고, 그 표준을 세계에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내리는 설계의 결정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도시의 온도를 결정한다. 기술과 인간이 공존하는 가장 따뜻한 삶의 터전, 그것이 우리가 함께 꿈꾸어야 할 에이전틱 도시의 진짜 미래다.
김태형 단국대 대학원 데이터지식서비스공학과 교수·정보융합기술·창업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