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영화사냥]형사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뛰어난 미장센, 새로운 화면미학을 창조한 이명세 감독의 신작 ‘형사’는, 그가 할리우드에 가서 5년동안 영화를 만들려다 좌절한 뒤 국내로 컴백해서 만든 작품이었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세계 시장으로 다시 발돋움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게다가 더 솔직한 작가 자신의 욕망은,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에게 자신의 능력이 갖고 있는 극대치를 보여주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영화가 나올 것인가 충무로의 기대를 모았었다. 이명세 미장센의 결정판이 될 것이라는 소문은 그래서 나온 것이었다.

더구나 그가 설립한 영화사에서 직접 기획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명세 감독은 물질적으로도,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자신의 모든 것을 ‘형사’에 올인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복합적 야심에 가득찬 ‘형사’가, 까다로운 일본 투자자들의 몇 차례에 걸친 방한에서 합격점을 받아 추가 펀딩을 받았다는 사실도, 충무로의 좋은 입소문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형사’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 여형사를 소재로 한 방학기 원작만화를 영화화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같은 원작을 TV 드라마로 만든 ‘다모’와 뿌리가 같다. 더구나 여주인공도 하지원으로 같다. 그러나 ‘다모’와는 전혀 다른 영화가 만들어졌다.

하지원의 캐릭터도 다르다. ‘인정사정….’의 여자 박중훈을 보는 듯, 껄렁하면서도 코믹한 건달 같은 느낌이 난다. 어떤 것이 우월한가 비교하는 것은 매체의 다름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대중들은 아마도 TV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명세의 ‘형사’는 선명한 내러티브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자신들의 감정이입이 훨씬 용이하며, 이야기 선이 굵고 선명한 TV 드라마 ‘다모’가 더 그리울 것이다.

‘형사’의 기본 제작 계획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숱한 해외 영화제를 다니며 세계 영화계에서 어떤 것이 통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김기덕 감독이, 언어를 극도로 생략한 ‘활’을 만들어 국내 관객은 외면한 채 세계 관객을 향해 내놓았듯이, 이명세 감독 역시 언어를 극도로 생략하고 시각적 아름다움을 위주로 국내 관객보다는 세계, 특히 미국 관객들을 겨냥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명세 감독에게 내러티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서사는 기본 뼈대만 있으면 된다.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하고, 동양문화의 상징성을 극대화 한 시각적 도취 속에, 슬픈 눈(강동원 분)과 남순(하지원 분)의 로맨틱한 감정선만 살아 있으면 성공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대중영화의 기본 힘은 내러티브에서 발현된다. 서사구조가 취약한 영화가 시각적 화려함으로 그것을 감추려고 할 때 비극은 시작된다. 내용과 형식이 서로 조응하지 못한 채, 형식적 수사학에 내러티브를 헌납하고 있다. 이명세 감독은 자신의 비주얼한 효과를 창조하는 능력을 너무 과시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현대적 공간보다는,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할 수 있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선택했고, 그러면서도 국적 불명의 의상과 음악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시대상이 무시된 퓨전 영화도 아니다. 이것은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하기 위한 전략이지만, 너무나 흔한 수법이고 속이 드러나 보인다. 나는 그게 싫다.

일본 만화의 한 컷처럼 보이는 슬픈 눈의 전체적인 컨셉트도 그렇다. 그의 헤어 스타일이나 의상은 한국적이라기보다는 일본적이고 중국적이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볼 때는 ‘동양적’이다. 이명세 감독은 이것을 노린 것이다. ‘형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병조판서 역의 송영창이다.

원조교제 사건으로 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그는, 그의 연기 중 가장 뛰어나고 오래도록 잊지 못할 명연기를 보여주었다. 또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며 코믹한 캐릭터로 등장한 안성기도 오랫만에 제 역할을 맡아서 슬픈 눈과 남순 사이의 개인적 로맨스와, 그들 뒤에 도사린 음모에 가득찬 시대공간을 이어주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