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한류’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인가.
한국의 온라인게임 종주국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액토즈소프트가 중국 샨다에 넘어간데 이어 전세계 37개국에 게임을 수출한 그라비티마저 일본 소프트뱅크 계열사에 팔리면서 ‘온라인게임 메카’를 꿈꿔온 한국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 이어 세계 메이저 온라인게임시장으로 부상한 중국과 일본에서 시장주도권을 통째로 현지 기업에 뺏기면서 자칫 한국 게임이 ‘국내용’으로 전락할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중·일 온라인게임시장의 국경 개념이 점차 무너지고 있는 추세라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업체들이 한국 시장을 역습하는 상황까지 우려하고 있다. 가뜩이나 지분구조가 취약한 국내 게임업체들이 최근 경쟁 격화로 체력이 바닥 난 경우가 많아 제2, 제3의 그라비티가 잇따를 수 있다는 경고도 쏟아지고 있다. 이 때문에 5000년 역사상 3대 발명품으로 꼽혀온 한국 온라인게임 산업보호와 세계화 전략을 새로짜야 한다는 목소리도 한층 고조되고 있다.
그라비티가 일본 소프트뱅크에 매각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게임업계는 한때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액토즈소프트가 중국 샨다에 넘어간 지 8개월 만에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게임배급사가 외국 자본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특히 그라비티는 온라인게임 ‘라그나로크’를 37개국에 수출, 한국 온라인게임 세계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기업이라 충격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다.
게임업계 한 CEO는 “액토즈가 샨다에 넘어가면서 중국 MMORPG 1등 자리를 통째로 빼앗긴데 이어 이번에는 그라비티까지 넘어가면서 차세대 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일본 시장마저 내주게 됐다”며 안타까워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라비티의 ‘라그나로크’는 일본뿐 아니라 동남아, 남미 등 세계 각국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어 잠재적 가치는 무궁무진했다”며 “그라비티 기업 하나가 아니라 한국 온라인게임의 글로벌 배급 인프라가 모두 넘어간 기분”이라고 말했다.
# 온라인게임 종주국 위상 흔들
게임업계 관계자들은 그라비티가 소프트뱅크에 팔리면서 한국 온라인게임 세계화 전략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액토즈 매각으로 우려됐던 중국으로 기술유출이 이젠 일본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온라인게임 소스코드와 서버 및 운영 노하우에서 비교우위를 누려온 한국기업의 위상이 크게 약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무게을 얻고 있다. 더구나 그라비티의 37개국에 달하는 게임배급 인프라가 넘어가 기술뿐 아니라 글로벌 비즈니스에 대한 노하우 마저 고스란히 넘어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이같은 우려는 중국시장에서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2년전만 해도 60%에 달하던 한국 게임의 중국시장 점유율은 30%대로 뚝 떨어졌으며 인기순위에서도 중국게임이 한국게임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MMORPG의 경우 ‘전기세기’ ‘멍환시유’ ‘대화시유’ 등 이른바 ‘미르의 전설2’ 아류작으로 불리던 게임이 원작인 ‘미르의 전설2’를 앞질렀고, 게임포털에서도 부동의 1위자리를 지켜오던 NHN의 ‘아워게임’이 ‘큐큐’라는 중국 현지업체가 서비스하는 게임포털에 정상자리를 내줬다.
중국 최대 게임전시회 차이나조이에 지난해 까지만해도 출품작의 50% 이상이 한국게임으로 채워졌던 것과 대조적으로 올해는 중국 자체개발 게임이 40%이상 늘어난 반면 한국 게임이 20%에 못미친 것도 중국게임의 대반격을 예고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때문에 ‘그라비티 매각 쇼크’는 중국업체에 이어 일본업체도 온라인게임 주요 라이벌로 가세하는 계기로 보고 있다. 특히 중국 게임이 빠른 모방과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저가 공세를 무기로 내세우는 반면 콘솔 및 아케이드 게임 개발에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이 온라인게임 개발에 팔을 걷어부치기 시작하면 한국시장 ‘안방’도 잠식당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 제2, 제3의 그라비티 가능
전문가들은 ‘그라비티 매각사태’가 충격적인 것은 이를 계기로 제2, 제3의 그라비티가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온라인게임 시장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상위그룹 몇몇 업체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업체들이 수익율 악화와 경영난에 시달리는 등 체력이 바닥 난 상태라 CEO들이 해외 매각을 통한 ‘캐쉬아웃(cash out)’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취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유력 게임 배급업체 한 CEO도 이번 사태가 터지자 “최근 해외 업체로부터 지분 매각에 대한 구체적인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한국 게임업체들의 취약한 지분구조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엔씨소프트, 넥슨 등 메이저를 비롯해 대부분의 업체들이 대주주가 마음만 먹으면 경영권을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지분구조가 소수 몇명에게 집중돼 있는데다 중국이나 일본업체에 비해 시가총액이 적어 ‘적대적 M&A’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 게임산업 보호를 위해 주요기업의 해외 매각을 규제하는 제도나 법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중앙대 위정현 교수는 “CEO가 마음만 먹으면 기업을 해외에 매각할 수 있는 지금의 구조로는 외국 자본의 대공세 앞에서 한국 온라인게임 산업의 경쟁력을 지키기는 사실상 무리”라며 “M&A가 활성화된 미국의 경우에도 IBM PC를 중국에 매각하려 하자 국가안보심리 등의 제도를 내세워 미국 정부에서 제동을 건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온라인게임산업보호를 위한 특단의 법과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세계화 전략 ‘대수술’ 불가피
‘그라비티 매각사태’를 계기로 한국 온라인게임의 세계화 전략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중국과 일본업체의 시장지배력 강화로 지금까지 파죽지세로 뻗어나가던 ‘게임한류’에 제동이 걸리게 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는 한·중·일 온라인게임시장의 헤게모니를 놓고 3국의 온라인게임업체들이 격돌하겠지만 앞으로 동남아 등 아시아 시장은 물론 북미 등에서 3국이 격돌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세계 3대 게임강국 진입’이라는 막연한 슬로건만 있지 구체적인 각론이 없던 정부의 글로벌 비즈니스 전략이 심도깊게 연구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업계 한 관계자는 “액토즈와 그라비티가 하청업체격인 현지 배급업체에 넘어간 것은 한국 게임업체들의 시가총액이 이들의 10분의1 정도밖에 안되는 등 세계시장에서 평가절하돼 있는 것도 큰 요인”이라며 “올해로 예정된 국제 게임전시회가 적어도 2년전에만 시작됐더라도 해외에서 한국 게임업체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정부의 발빠른 대응을 주문했다.
게임업계에서는 제2, 제3의 그라비티가 다시 현실화된다면 ‘세계 3대 게임강국’이나 ‘게임 한류’와 같은 화려한 수식어는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장지영기자 장지영기자@전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