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서점에서는 이 기상천외한 책을 도대체 어느 코너에 둬야 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것은 동화도 아니었고 추리물이나 SF, 전설, 신화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소설이 인기를 끌고 수많은 작품들이 나오면서 팬터지라는 장르가 정립됐고 서점에서도 당당히 하나의 코너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프랑켄슈타인’을 시작으로 코난 도일, 쥘 베른이나 H.G 웰즈 등을 거쳐 수많은 SF가 쏟아져 나왔지만 이 작품들 역시 어느 코너에 둬야 할지 혼란을 야기했다. 선지자들에 이어 20세기 초에도 SF(상상 과학)라는 장르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나 쥘 베른의 ‘해저 2만리’까지만 해도 과학적 환상(Science Fantasy)이나 모험물이라 부르는 것으로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H.G 웰즈 시대에 이르러 ‘투명인간’이나 ‘타임머신’ ‘닥터 모로의 섬’같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부르는 이름은 폭증하게 되었고 ‘과학적 로맨스’나 ‘유사 과학 얘기’와 같은 단어가 등장했다. 사람마다 SF를 다르게 부르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또 ‘어메이징 스토리즈’(놀라운 얘기들)라는 SF 잡지가 창간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사람들은 ‘원더 스토리즈’ ‘스타틀링 스토리즈’ ‘어스타운딩 스토리즈’라며 제각각 다른 이름(모두 ‘놀라운 얘기들’이란 뜻이다)을 양산했고, 어떤 사람은 ‘사이언스 팬터지’라고 부르는 작품을 다른 사람은 ‘원더 스토리’라고 불렀으며 또 다른 사람은 ‘사이언스 로맨스’라고 하는 등 혼란이 극에 달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휴고 건즈백이란 작가가 새로운 잡지를 창간하면서 ‘Science Fiction’이란 이름을 만들 때까지 계속됐다.
SF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휴고 건즈백은 어지간한 SF 마니아 조차 잘 모르는 이름이지만 그는 ‘랄프 124C41+’(1911)라는 소설로 우리가 생각하는 SF를 처음 만들어낸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업적은 SF라는 단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어메이징 스토리즈’라는 세계 최초의 SF 잡지를 만들어 후배들을 이끌고(실례로 ‘아이, 로봇’의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 역시 이 잡지를 통해 데뷔했다) 독자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도록 팬덤을 구성해 작가군을 구축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남긴 것이다(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마추어에 의한 휴고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1910년대를 거쳐 1938년까지 HG 웰즈를 계승하는 초기 SF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진정으로 SF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은 1938년(‘슈퍼맨’이 탄생한 해기도 하다)부터 시작된 이른바 황금 시대였다. ‘반지의 제왕’이 등장해 팬터지라는 장르가 탄생하기도 했던 이 시기에는 ‘스타쉽 트루퍼스’로 유명한 로버트 하인라인을 필두로 ‘아이, 로봇’ 이나 ‘파운데이션’ 등으로 저명한 아이작 아시모프 그리고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쓰고 현재까지도 창작을 계속하고 있는 아서 C 클라크와 같은 SF 업계에 이름 높은 3대 거물들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수많은 작품을 토해냈다.하지만 황금 시대에 수많은 작가들의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한편으로 그들을 뒤에서 지원했던 한 사람의 편집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존 W 캠벨 2세라는 이름의 편집자는 소설가로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지만, 잡지의 편집자로서 아시모프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에게 영감을 줌으로 황금 시대를 이끌어 냈다.
다소 편중된 취향으로 인해 비난을 사기도 했고, 나중에는 론 허버드의 사이비 종교(바로 톰 크루즈가 열중하고 있는 사이언톨로지의 전신)에 빠졌지만 황금 시대를 낳은 그의 업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존 캠벨 기념상과 신인상을 제정해 그를 기념하고 있다.
황금 시대가 가장 좋았던 시기를 말한다면 1950년대 이후 SF 소설은 쇠퇴했다는 말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일단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1950년대 이후 60년대에도 70년대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SF 작품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황금 시대가 명작을 탄생시켜 사람들의 기대치를 높여 나간 시기였다면 그 이후에는 이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간 시대였다.
특히 독자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아시모프 같은 ‘어려운 SF’ 만이 아니라 보다 많은 독자들이 즐겁게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작품들이 나타났다(국내에서도 번역 소설 뿐만 아니라 많은 SF 작품들이 등장하게 됐고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황금 시대의 SF가 안경잽이들의 전유물이었다면 그 이후의 SF는 누구나 편하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작품이 된 것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토탈 리콜’ 등의 원작자로 유명한 필립 K. 딕을 시작으로 웨스트우드의 세계 최초의 리얼타임 전략 게임으로도 유명한 ‘듄’ 시리즈의 프랭크 허버트 등 수많은 작가가 이 시기에 활약했고 어슐러 르귄 같은 여성 작가들의 활약도 돋보였다(어슐러 르귄은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더불어 3대 팬터지 작품이라 불리는 ‘어스시의 마법사’시리즈를 탄생시킨 작가이기도 하며 독창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헤인’시리즈라는 SF를 선보이고 있다).
황금 시대 이후에 작가로는 ‘뉴로맨서’의 윌리엄 깁슨을 빼놓을 수 없는데 국가가 아닌 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근 미래를 소재로 한 이 작품에서 그는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선보이며 충격을 주었고 ‘공각 기동대’나 ‘매트릭스’ 등의 작품에 절대적인 영향을 줬다(놀랍게도 그는 컴맹이었다).황금 시대 이후 70년대까지 SF가 조금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대중에 퍼져나간 시대였다면 1980년대 이후의 SF는 무엇보다도 대중적인 작품들이 넘쳐나게 된 시기라고 보아도 좋다.
1970년대 말부터의 큰 변화를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더티 페어’를 중심으로 많은 스페이스 오페라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다나카 요시키의 전설적인 역작 ‘은하영웅전설’이 발표됐으며 미국에서는 새로운 작가들이 신작을 발표했고 그 흐름의 정점에 서 있던 것은 단연 - 그 자신은 SF 팬도 아니었고 스스로 SF작가라고 말하지도 않는 - ‘쥬라기 공원’의 작가 마이클 클라이튼이다.
1969년 외계에서 날아온 바이러스에 의한 위기를 그린 ‘안드로메다 스트레인’으로 혜성같이 데뷔한 그는 율 브린너 주연의 ‘웨스트 월드’라는 SF 명작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고 그 후 ‘스피어’나 ‘타임라인’ 등의 작품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며 붐을 일으켰다.
의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으며 피플지에서 선정한 세계 50대 미남미녀의 ‘선’이기도 했다는 그가 미국 대중 SF 작품의 정점에 서 있다면 ‘타나토노트’를 시작으로 ‘개미’나 ‘뇌’ 그리고 최근에는 ‘인간’ 등의 작품으로 활약하고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유럽 대중 SF의 선봉장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개미’나 ‘뇌’ 등 어찌 생각하면 평범한 소재에 과학적 상상력을 부여해 환상과 과학의 세계를 넘나드는 그의 작품은 SF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독특한 소재를 SF적 감각으로 흥미롭게 연출하고 있다.
스티븐 킹처럼 SF팬으로 출발한 이들도 있지만 한편으로 마이클 클라이튼이나 베르나르 베르베르, 톰 클랜시처럼 최근의 SF 작가들은 SF라는 장르를 일종의 편리한 도구로 이용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말하자면 SF가 좋아서 쓰기보다는 미래 세계를 연출한다는 가능성을 좋아한다고 할까?
그것은 다나카 요시키로 대표되는 일본의 작가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뭔가를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흥미로운 과학적 상상력으로서의 SF를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고전적인 SF팬들에게 있어 그것은 아쉬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필자 같은 이들에게 그것은 너무도 즐거운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SF(상상 과학)이란 것은 본래 미래의 가능성을 즐기는 방법일 뿐이며 교과서나 사전처럼 어렵고 복잡한게 아니니 말이다.SF 칼럼리스트. 게임 아카데미에서 SF 소재론을 강의 중이며, 띵 소프트에서 스토리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SF WAR 클럽(http:www.joysf.com)이란 팬 페이지로 유명하다.
◇ 두 명의 미소녀가 활약하는 ‘더티페어’. 평범한 액션물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참신한 아이디어로 SF 작품상을 두번이나 받은 소설이다.
◇ 휴고 건즈백. 그가 아니었다면 SF 팬덤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 어메이징 스토리즈. SF소설의 진정한 역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나왔다고 단순한 액션물로 생각하면 곤란한 법. 이 작품 역시 황금 시대 이후 작품 중 하나를 원작으로 하는 훌륭한 SF다.
◇ ‘매트릭스’의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한 이 영화는 윌리엄 깁슨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다.
◇ 마이클 클라이튼의 작품은 빠짐 없이 국내에소개된다.
◇ 베르베르의 작품은 SF적인 감각이 잘 살아 있다.
◇ 모래 벌레의 위용은 게임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사막의 행성 ‘듄’
<전홍식 pyodogi@sfwa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