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외과 의사인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이번 월드컵을 ‘통증 월드컵’으로 지칭했다. 처음에는 선수들이 16강에 들기 위해 매우 격하게 운동하다 보니 부상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자기가 운영하는 병원에 허리·목·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찾는 사람들이 대폭 늘었다는 것이다. 평소보다 3분의 1 정도 환자가 늘어났다고 했다. 이유는 심야에 하는 축구를 보려고 숙면을 취하지 못해서 각종 부위 통증 환자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아예 침대에 눕지 않고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목과 허리 통증 때문에 병원을 찾더라고 그 친구는 말했다. 밤이고 낮이고 마치 열병을 앓듯이 들떴다. 첫사랑의 신열이 오듯, 6월 한 달 우리는 미쳐 있었다. 마치 80년대 직선제를 외치며 광화문 거리를 메웠던 그 열기만큼, 월드컵이라는 이름은 우리를 미치도록 잠들지 못하게 했다.
미친 기운을 뜻하는 ‘광기’는 이성을 잃은 정신변조 상태를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광기는 이상 상태며 치료 대상이다. 그러나 광기 속에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하며, 그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는 뜻도 숨어 있다. 파스칼도, 미셸 푸코도 광기가 담고 있는 변화와 독창성에 주목했다. 그래서 광기는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이라 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월드컵처럼 집단적 광기에 빠질 때 그 역동적인 힘은 대단하다.
우리는 87년에, 2002년에 집단적 열망으로 뭉쳐진, 마치 신앙처럼 단단해졌던 그 무엇인가를 경험했다. 우리 대표팀이 16강전에서 탈락하면서 갑자기 축구 열기가 사그라졌다. 속상하니까 아예 축구를 외면하기도 한다. 가전업체들은 디지털 TV수요가 스위스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며 이제 에어컨과 냉장고 판촉전을 준비중이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우리는 2002년 월드컵 이후 고선명(HD) TV 붐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던 것을 알고 있다. 29인치 컬러TV에서 디지털TV로의 전환이 일어나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TV 산업을 만들어 냈다.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이미 HD TV로 월드컵 시청을 경험했다. 이들이 경험한 HD 세상에서 다시 단순한 컬러 TV 세상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2006년 월드컵 후폭풍은 이제 시작이다. HD 세상으로의 대전환이 시작됐다.
디지털산업부 김상룡 차장@전자신문, sr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