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16) 삼성전자의 태동, 외국기술과의 합작

[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16) 삼성전자의 태동, 외국기술과의 합작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삼성전자 연대표

 금성(현 LG)과 함께 ‘대한민국 전자산업 50년’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삼성이다.

 삼성은 전자산업이야말로 기술·노동력·부가가치와 내수·수출 등 우리나라 경제 부흥에 꼭 맞는 사업이라는 판단 아래 이 분야의 신규 진출을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해 일본과의 기술제휴로 합작회사 설립을 모색하는 동시에, 1969년 1월 13일 이를 추진할 지주회사로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이 무렵 삼성은 삼성전자를 세계 굴지의 종합전자회사로 키우기 위해 △전자단지의 대형화 △공정의 수직계열화 △기술개발 능력의 조기확보라는 3대 원칙을 세웠다. 이에 따라 삼성은 경기도 수원과 경남 울주군 가천에 대단지 공장용지를 마련했다. 이어 1969년 12월 4일 일본 산요전기와 합작으로 전자부품과 세트 제품을 생산할 ‘삼성산요전기’를 설립한다.

 이듬해에는 일본 NEC와 손잡고 TV용 브라운관과 진공관, 표시방전관 등을 생산할 ‘삼성NEC(현 삼성SDI)’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이 출발부터 순탄치는 않았다.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된 그해 6월 30일.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은 긴급이사회를 열고 ‘삼성전자와 일본 산요전기 간 합작투자에 관한 진정서’를 채택한다.

 금성사, 삼화콘덴서 등 당시 57개 회원사 명의로 작성된 이 진정서의 골자는 삼성물산이 일본의 산요전기·스미토모상사 등과 합작 투자해 설립하는 삼성산요전기의 출범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삼성의 최대 라이벌인 금성사가 주축이된 조합은 진정서에서 “정부가 삼성과 산요의 합작투자를 인가한다면, 과당경쟁의 격화를 촉발시켜 결국 국내 업체를 고사시키고 말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이때 삼성산요는 이미 일본 산요의 자본 및 기술지원을 통해 한국에서 TV와 라디오 등을 생산해 85%는 수출, 15%는 내수시장에 공급한다는 사업계획을 세워 놓고 정부 측 인가만을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이 같은 준비가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물밑 작업이 치밀했다는 증거다. 실제로 1964년 삼분폭리 사건과 1966년 한국비료 시카린 밀수사건 이후 2선으로 물러나 있던 당시 이병철 회장은 1968년 2월 복귀와 함께 삼성물산에 ‘개발부’를 신설하고, 당시 신훈철 삼성물산 상무(이후 삼성전자·삼성산요·삼성항공·삼성코닝 사장 역임)에게 한국비료의 경영 공백을 메울 신규사업 개발을 지시한다.

 2개월 후 신 상무는 전자산업이 가장 유망한 분야라고 보고했다. 먼저 라디오와 TV 등 민생용 전자기기 제조를 통해 경험을 쌓은 뒤, 전자교환기 등 산업용 전자로 사업을 확대해 간다는 마스터플랜까지 제시했다. 이때가 1968년 6월이다.

 이후 삼성의 행보는 일사천리다. 이듬해인 1969년 1월 13일 그동안 삼성물산 개발부에서 추진하던 전자사업을 전담할 수권자본금 6억원의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정식 발족시켰다.

 이 같은 파죽지세와 중앙일보·TBC를 통한 여론 형성에 힘입어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은 오래지 않아 기정사실화된다. 5·16 이후 승승장구하던 금성사였지만 삼성의 돌진에 제동을 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따라 조합은 정부가 만약 삼성산요를 인가하면 △외국인 합작기업이라는 시각에서 내수를 전면 금지시킬 것 △수입원자재는 반드시 역수출용으로만 허가할 것 △기존 국내 부품 계열화업체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해줄 것의 세 가지를 요구했다.

 정부는 1969년 9월 결국 ‘생산 전량을 수출해야 한다’는 조건하에 삼성산요전기의 설립을 인가했다. 정부는 또 같은 기간에 삼성이 일본 NEC, 스미토모상사 등과 50 대 40 대 10의 지분으로 설립을 신청한 ‘삼성NEC(현 삼성SDI)’도 생산제품(진공관 및 브라운관)의 전량 수출을 조건으로 인가했다.

 드디어 삼성산요전기는 1969년 12월 4일, 삼성NEC는 이듬해 1월 20일 각각 정식 출범하게 된다. 이로써 삼성은 1970년대 금성과 본격적인 ‘별들의 전쟁’을 벌일 채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외국기술과의 합작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에는 산요전기 등 일본 기술과의 합작이 큰 역할을 했다.

 잇단 비리로 2선에 물러나 있던 이병철 회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 미쓰이물산의 미즈가미 회장의 주선으로 도시바와 마쓰시타 등 일본 전자업체 경영진과 비밀리에 접촉, 합작투자와 기술제휴처 모색을 통해 재기의 칼날을 간다.

 이 회장의 제의에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 산요전기의 이우에 도시오 회장이다. 이 회장은 그의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이우에 회장이 ‘전자산업은 모래가 원료인 실리콘 칩에서부터 TV에 이르기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부가가치 99%의 창조산업’이라고 말했다”며 “내가 전자산업 진출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우에 회장 덕분이다”고 적고 있다.

 1969년 1월 이 회장이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기술자 63명을 해외기술 연수 명목으로 일본에 보낸 것이다. 설립 첫해에만 세 차례에 걸쳐 총 106명의 엔지니어를 산요전기 등에 보내 일본의 선진 기술을 익혀오게 했다.

 하지만 양측의 허니문 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삼성과 산요는 합작사 설립 3년여 만에 결별을 맞는다. 이유는 삼성전자와 삼성산요전기의 생산품 가운데 라디오, TV 등 일부 제품이 중첩되면서 국내 시장에서 양자 간 경쟁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삼성산요전기는 원래 정부가 수원공장의 생산품 전량을 해외에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인가한 회사다. 하지만 삼성은 대정부 로비를 통해 슬그머니 이 조건을 완화시킨다. 그 결과 1972년부터는 내수 공급이 본격적으로 확대됐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악재가 터진다. 일본 산요전기가 삼성산요전기에 독점 공급하는 부품·재료의 가격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받아온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양측 간 갈등은 1972년 삼성전자가 삼성산요전기와 경쟁 관계에 있는 제품의 생산에 박차를 가하면서 정점을 치닫게 됐다.

 결국 1974년 2월 삼성산요전기는 ‘삼성전기’로 상호를 변경, 양측은 공식 결별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