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41) CDMA 시대 개막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이동전화 가입자 수

 지난 1961년 8월, 대한민국 최초의 이동전화 서비스가 개시됐다. 대상은 80여명의 시범 가입자였다. 당시 이 방식은 일반 유선전화와 유사했다. 교환수를 호출, 차량전화번호를 알리고 교환원이 다시 선택 호출장치 버튼을 누르면 전파신호가 발사돼 차량 내 전화의 벨이 울리는 식이다.

 따라서 통화품질도 나쁘고, 이동전화 수요에도 충분히 대처할 수 없었다. 이용 역시 정보기관 고위 공직자 등으로 제한됐다.

 이후 1973년 기계식 IMTS(Improved Mobile Telephone Sevice)가, 1975년에는 NMRS(New Mobile Radio System)가 각각 도입됐다. 1976년에는 반전자식 IMTS 서비스가 실시됐다. 1984년 3월 한국통신(현 KT)의 자회사인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설립되면서 그해 5월부터 AMPS(Advanced Mobile Phone Service) 셀룰러 시스템이 도입된다. 이를 통해 차량전화, 일명 카폰 서비스가 실시되면서 실질적인 이동전화의 일반화가 시작된다.

 그후 1988년 7월부터 서울올림픽의 영향으로 이동전화의 보급 및 가입자가 증가한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단말기 가격과 통신비의 부담으로 대중화까지는 갈 길이 먼 상황이었다.

 88올림픽 다음해인 1989년 체신부는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 개발’을 국책과제로 선정, 코드분할 다중접속(CDMA) 개발에 착수한다.

 이에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CDMA 원천기술 보유사인 미국 퀄컴과 기술협력 계약을 체결, 개발에 나선다.

 1993년 9월 CDMA 사업을 가속화하기 위해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에 CDMA 개발사업단이 꾸려진다. 이를 주축으로 LG·삼성·현대 등 업체가 장비 개발에 참여한다. 이들 업체는 시스템 성능향상에 들어가고 한국이동통신은 통신망 설계에 착수한다. 시기별·지역별 가입자 예측자료를 토대로 CDMA 통신망이 구성됐다. 기존 아날로그 통신망과의 접속 방식도 갖춰졌다.

 1개 기지국당 서비스 범위는 반경 5㎞. 수도권 지역에 필요한 기지국 수는 200개였다. 이론상 아날로그의 10배가 넘는 CDMA 통화용량을 확인한 결과, 실제로도 아날로그의 10배가량의 통화용량이 나왔다. 당시 기술진 사이에서 탄성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개통을 불과 2개월 앞두고 사업단은 주파수 추가배정 불가라는 장벽에 부딪힌다. 하는 수 없이 수도권 지역 개통을 미루고 첫 서비스 지역을 인천권으로 우회했다. 기지국 설치부터 통화시험까지 원점부터 다시 출발하는 셈이었다.

 드디어 이 땅에 CDMA 시대가 개막된 것은 1996년 1월 3일. 대상 지역은 인천과 부천 지역이었다. 서울 전 지역에서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가 개시된 것은 그해 4월의 일이다. 상용화 9개월 만에 전국 서비스가 실시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모두가 놀랐다. 세계도 놀랐다. 단군 이래 최대의 기술혁명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다음해인 1997년 10월 1일부터는 한국통신프리텔(현 KTF), LG텔레콤, 한솔PCS(현 KTF) 3사가 016, 019, 018의 번호로 개인휴대전화(PCS) 상용서비스를 실시하면서 민간 시장에 CDMA 시대가 본격 개막됐다.

 기존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에 이어, CDMA 기술을 채택한 PCS사업자가 나타나자 단말기는 ‘휴대’ 전화라는 명칭에 걸맞게 작아졌다. 통신료도 대폭 인하됐다.

 이동전화 가입자 수가 폭증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996년 318만989명이었던 휴대폰 가입자는 1년에 두 배씩 늘어나 1998년 1000만명을 넘어섰다. 이후 1999년 2000만명, 2002년 3000만명에 이른다. 4000만명 시대가 열린 것은 2006년이다. 2008년 5월 현재 4473만8000명에 달한다.

 류경동기자 ninan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