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이젠 최고정보책임자(CIO)가 아니에요. 더 이상 CIO로서 수행할 역할도 없는데요.” 해외에 본사를 두고 있는 글로벌 업체인 A사 CIO의 말이다. 적지 않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CIO들이 참석하는 행사에서 여러 차례 본적이 있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다국적 기업의 국내 지사 CIO가 한말 치고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왜요? 왜 CIO가 아닌거에요?” 기자가 물었다. 기자 질문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후 이 CIO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행처럼 일고 있는 글로벌 통합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 CIO가 몸 담고 있는 회사도 최근 본사 차원으로 글로벌 통합을 진행해 완료했다고 한다. 보통 글로벌 통합을 추진하게 되면 IT를 포함한 지원업무가 대상이 된다. 이로 인해 한국 지사의 IT업무가 단순한 업무 외에는 모두 본사로 이관되게 된다. CIO로서의 역할이 사라진 셈이다.
현재 이러한 상황을 겪고 있는 CIO가 이 한명만이 아니다. 또 다른 글로벌 업체인 B사의 한국 지사 CIO는 최근 본사가 글로벌 통합을 추진하면서 일본 지사에 IT인력을 50% 줄일 것이라고 통보한 상태다. 그나마 시장이 큰 일본이 50%라면, 한국 지사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이젠 CIO 역할 축소만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부하 직원에 대한 구조조정까지 해야 하는 부담이 더해졌다.
C사는 아예 IT조직 해체라는 소문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글로벌로 이미 IT부분이 상당 부분 통합이 이뤄졌기 때문에 한국 지사에 굳이 IT조직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CIO의 역할은 더더욱 없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글로벌 업체의 한국 지사 CIO들의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한 국내 지사 CIO는 “본사의 일방적인 글로벌 IT통합 정책으로 인해 국내 현지에서는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이 있다”면서 “이 중 현업 요청사항을 제때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실제 현업에서 비즈니스 환경 변화에 따라 급하게 요구되는 사항들이 있지만, 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본사의 의사결정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즉각적으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때로는 이런 상황 때문에 고객을 놓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 본사도, 현업부서도 이해하는 곳은 없다. 그저 IT가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일각에서는 좋은 국산 소프트웨어(SW)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로벌통합 전략에 따라 값비싼 외산 SW를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하고 있다. 어느 한 CIO는 “어떤 제품은 국내 들어와 있지도 않은 제품이어서 유지보수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CIO들이 불평만을 늘어 놓을 상황은 아니다. 또 이 문제가 유독 국내 지사 CIO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젠 CIO 스스로가 변화된 환경에 맞는 역할을 찾아야 한다. 어느 한 글로벌 업체의 한국 지사 CIO는 “CIO로 IT부문을 총괄하면서 전사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면서 “최근 글로벌통합으로 IT역할이 줄어들면서 전사 프로세스를 혁신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 CIO는 최근 들어 국내 지사 전체 프로세스를 대상으로 6시그마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