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2월 14일 목요일.
이날 전국 날씨는 겨울답지 않게 모처럼 낮 기온이 영상을 기록해 포근했다. 도심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한결 활기차고 가벼웠다.
정보통신부는 이날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표현한 신규통신사업자 허가신청요령을 확정해 발표했다. 통신사업은 미래라는 씨줄과 기술이란 날줄로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재계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대형 사업이었다. 삼성과 현대, LG, 대우 등 이른바 ‘빅4’와 중견, 중소기업들이 통신사업권을 따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 중이었다.
정통부는 통신시장 개방에 대비해 지난 7월 4일 ‘선(先)국내경쟁, 후(後)국제경쟁’이라는 기본원칙을 정했다. 1998년까지 국내 통신사업자수를 늘려 국내 경쟁체제를 갖춘 후 외국업체들과 경쟁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정통부는 이런 정책기조에 대해 7월 26일 공청회를 열어 각계 의견을 수렴했다. 이어 8월 10일 통신사업자 허가신청요령 1차 시안을 발표했다. 정통부는 1차 시안에서 8월 말 허가신청요령을 공고하고 12월 말까지 신규 통신사업자를 선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통부는 9월 7일 이 계획을 수정했다. 12월 말까지 허가신청요령을 공고하고 사업자선정은 1996년 상반기까지 마칠 계획이라고 변경한 것이다.
정통부가 사업자 선정을 1996년 4월 총선시기 이후로 미룬 것은 너무 서둘다가 특혜시비가 재연되는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경상현 정통부 장관도 기자들에게 “내년 4월 실시될 총선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선거가 끝난 5, 6월께 선정 작업을 마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혀 이런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정통부는 9월 14일 각계 인사들로 정보통신정책협의회를 구성해 자문을 구했다. 또 전자공청회를 열어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수렴했다.
재계는 정통부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했다. 혹시 일정에 변경이 있을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정이 늦어지면 그만큼 업체의 추가 비용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정통부가 허가요령을 발표함에 따라 통신사업 진출을 노리던 업체는 본선 출전 준비를 서둘렀다.
정통부는 허가신청 요령안을 발표하기 전 청와대와 사전에 입장을 조율했다.
이계철 차관(한국통신 사장 역임)이 한이헌 대통령 경제수석(15대 국회의원, 기술보증기금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교장 )과 만나 내용에 관해 협의했다. 워낙 사안이 중대해 경상현 장관이 허가신청요령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방안도 논의했다.
이에 대한 경상현 장관의 회고.
“그런 방안을 이 차관이 한 수석과 협의를 했어요. 필요하다면 장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한 수석은 정통부 안이 ‘좋다’면서 자신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정리를 한 것입니다.”
한이헌 경제 수석의 말도 경 장관의 회고와 맥락을 같이했다.
“청와대가 각 행정부의 정책에 일일이 관여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당시 청와대는 각 부처가 열심히 일할 수 있게 지원해 주는 역할에 치중했습니다. 청와대가 부처 일에 일일이 간섭하거나 관여하면 그 부처 장관이 소신껏 정책을 추진할 수 없습니다. 정통부 방안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고 더욱이 정통부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그것은 타당한 기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수석의 계속된 증언.
“당시 정통부는 경 장관이 직접 김 대통령에게 허가신청 요령에 대해 보고하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경 장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후 12월 20일 개각을 단행했는데 경 장관이 포함됐습니다. 그의 경질을 놓고 PCS 기술표준 때문이라는 뒷말이 나돌았습니다. 사실여부를 떠나 정통부 요구처럼 ‘경 장관이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할 자리를 마련해 줄 걸’ 하며 아쉽게 생각했습니다. 막상 그런 결과가 나오니까 경 장관에게 참 미안했어요.”
정통부는 1996년 4월 15일부터 17일까지 전국 및 지역사업별로 허가신청서를 접수한 뒤 6월 신규사업자를 선정한다고 밝혔다.
언론인 출신으로 공보관을 역임한 이성해 정보통신지원국장(정통부 기획관리실장, KT인포텍 사장 역임, 현 큐앤에tm 회장)이 사업자 신청요령을 발표했다.
그는 발표 후 기자들과 만나 “투명성과 공정성에 한 점의 의혹도 없도록 사업자를 선정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1차 심사에서 적격 판정을 받은 2개 이상의 업체가 출연금을 같게 제시했을 경우 추첨방식으로 선정한다는 결정에 대한 일부 부정적인 시각에도 입장을 밝혔다.
“1단계 심사에서 합격한 업체는 해당 분야의 통신사업을 수행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업체가 제시한 출연금이 같을 때는 추첨으로 사업자를 선정해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 국장은 “사업자 선정방식을 놓고 기존 통신사업자와 신규참여 희망업체,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심사를 통해 통신사업자를 선정하고 이어 출연금액 순으로 결정하되 만약 출연금 액수가 같은 경우 추첨으로 사업자를 선정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추첨방식이 며칠 후 정통부를 뒤흔드는 뇌관이 될 줄은 그 당시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이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정통부는 1차 자격심사, 2차 출연금 심사, 3차는 추첨 순서로 사업자를 결정키로 했다. 1996년 6월까지 개인휴대통신(PCS)과 무선데이터통신 분야의 전국사업자 각각 3개, 국제전화 1개를 비롯, 모두 7개 통신사업분야에서 30개 내외의 신규사업자를 선정키로 했다.
이규태 기획과장(서울체신청장 역임, 현 한국IT비즈니스진흥협회 부회장)의 회고.
“최종안은 그동안 발표한 시안에 비해 크게 달라진 내용이 없었습니다. 이미 전자공청회 등을 통해 의견수렴을 했고 미흡한 점을 보완한 상태여서 선정기준이 크게 바뀐 사항은 거의 없었어요. 다만 제안요청서(RFP)에 PCS의 기술방식을 CDMA로 한다는 점을 포함시켰습니다.”
정통부가 숙고 끝에 확정한 허가신청 요령을 잠시 살펴보자.
재계가 가장 관심을 가진 사항은 기술력과 출연금이었다.
우선 기술력 평가.
정통부는 이들 신규사업자에 대해 기술력 평가에 50%의 비중을 둔 1차 심사에 이어 서비스와 사업구역에 따라 정해진 상·하한선 내에서 일시 출연금을 제시, 최고액순으로 평가하는 2차 심사를 거쳐 결정하기로 했다.
그간 결정되지 않았던 2단계 심사방법 중 2차 정보통신 기술개발지원계획서(출연금) 심사방식과 관련, 서비스 및 사업구역에 따라 정해진 일시출연금의 상·하한선 범위 내에서 출연금을 제시토록 하고 최고액순으로 선정키로 했다.
정부가 외국의 사례를 검토, 사업개시 후 5년간 시장 누적 매출예상액의 일정비율을 산정, 제시한 일시 출연금 상한선은 PCS(1100억원), 국제전화(300억원), 발신휴대전화 전국사업자(190억원) 등이며 하한선은 상한선의 50%로 정했다.
그러나 1차 심사에서 적격 판정을 받은 2개 이상의 업체가 출연금을 동일하게 제시했을 경우 추첨방식으로 결정키로 확정했다.
1차 자격심사는 △서비스 제공계획 △설비규모 △재정적 능력 △기술개발 실적 및 기술개발 계획 △기술계획 및 기술적 능력 △허가신청법인의 적정성 등 6개 사항별로 적격 여부를 평가, 사항별로 60점 이상(100점 만점 기준), 전체 평균 70점 이상을 받아야 2차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차 심사 배점은 기술개발 실적 및 기술개발 계획에 30점, 기술계획 및 기술적 능력과 신청법인의 적정성에 각각 20점, 나머지 사항에 각각 10점을 배정, 기술부문의 평가에 50%의 비중을 두고 있다. 한국통신의 경우, 1차 심사를 통과하면 2차 심사는 면제하기로 했다.
허가신청요령은 또 허가대상 분야 별 신규사업자수를 △국제전화 1개(전국) △PCS 3개(전국) △TRS(주파수공용통신) 10개(전국 1, 지역 9) △CT-2(발신전용 휴대전화) 11(전국 1, 지역 10) △무선데이터 3개(전국) △무선호출 1개(지역) 등 최대 29개로 정했으며 전용회선 사업은 적격법인 모두에게 허가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특정분야 허가신청법인은 다른 사업분야와 사업구역에 중복신청할 수 없도록 하되 5% 미만의 지분참여는 가능토록 했다. 한국통신에 대해서는 국가기간통신사업의 주도적 사업자로 육성하기 위해 PCS, CT-2 전국사업에 중복신청을 허용키로 했다.
특정사업에 허가 신청을 낸 법인의 대주주(동일인 포함) 또는 그 법인에서 실질적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구성주주도 다른 허가신청법인의 5% 이상 주주가 될 수 없고 같은 분야에 허가 신청한 다른 법인의 주식을 소유할 수 없게 했다.
전기통신회선설비 임대사업의 경우도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촉진을 위해 중복신청을 허용키로 했다. 이에 따라 한전 등 자가통신설비보유자는 전용회선사업 외에 다른 사업에도 신청이 가능해졌다.
지역사업에는 중소기업 및 중견기업의 참여를 우대, 대규모 기업집단의 참여를 제한키로 했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중앙회는 PCS 사업참여를 위한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12월 16일 총자본금 2000억원으로 하는 컨소시엄을 1996년 3월 말까지 구성해 4월에 사업허가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허가신청에 필요한 서류는 허가신청서(기존사업자의 경우 변경허가신청서), 정보통신발전을 위한 기술개발지원계획서(출연금), 사업계획서(법인의 기본사항, 영업계획서, 기술계획서, 기술협력, 연구개발, 인력양성 계획서와 요약문) 등이다.
하지만 이 허가신청요령은 며칠 후 정통부 장관이 바뀌면서 통신사업자 선정은 다시 격랑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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