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62>

 한미통신회담<5>

 

 1991년 5월 20일.

 제1차 한미 국제VAN(부가가치통신망)회담이 서울 체신부 14층 회의실에서 2박3일 일정으로 개막됐다. 국제VAN서비스개방은 한미통신회담에서 큰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측은 첫 회담 때부터 초지일관 국제VAN시장 조기개방을 끈질기게 요구해 왔다.

 회담을 앞두고 정부가 한국 측 대표단에 내린 훈령은 간단명료했다. 현행 법령과 제도 안에서 수용가능한 사항은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한국 측의 국제VAN협상 조기타결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봄이 오면 계곡 얼음이 녹듯 양측의 국제VAN협상 기류도 차츰 변화가 일고 있었다.

 한국 측에서는 이인표 통신개방연구단장(정통부 통신정책지원국장, SK텔레콤 고문 역임)을 수석대표로 김창곤 통신협력과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LG유플러스 고문), 구영보 정보통신업무과장(우정사업본부장, 프로그램심의조정위원장 역임, 현 SK텔레콤 고문), 외무부 통상1과 홍지인 사무관(현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부장), 노영규 체신부 통신협력과 사무관(현 방통위 기획조정실장), 김명룡 정보통신업무과 사무관(현 우정사업본부장), 자문위원으로 체신부 장관 자문관인 성극제 박사(현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와 통신개발연구원 최병일 박사(현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등 8명이 참석했다.

 미국 측에서는 수석대표인 낸시 애덤스 미 무역대표부(USTR) 아태담당부대표와 상무성 관계자 등 7명이 참석했다.

 양측은 한국이 미국 측에 미리 제시한 약정안(案)을 중심으로 국제VAN서비스개시를 위한 협상을 벌였으나 서로 이견을 좁히는 데는 실패했다.

 한국 측은 협상의제로 국제VAN 문제만 논의하고 현행 법 테두리 안에서 서비스제공을 허용한다는 전제 아래 서비스 범위, 사업자 등록제, 사업자간 운용협정에 대한 정부승인 등을 다루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미국 측은 국제VAN사업에 대한 외국인투자제한(현행 50%이내) 폐지와 등록, 신고 등에 대한 정부 규제 완화 문제를 주장했다. 양측은 초반에 서로 입장차이를 확인하는데 그쳤다.

 한국 측은 초지일관 국제VAN약정은 기존 법령제도안에서 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고수했다.

 국제VAN서비스는 국제전용회선을 빌려 국제간에 DB(정보검색)·DP(정보처리)·전자사서함·MHS(메시지처리서비스) 등 축적전송서비스, CRS(컴퓨터항공예약)·EDI(거래정보교환) 등 처리전송 등의 사업을 할 수 있어 미국 측 최대 관심사였다.

 입장을 좁히지 못한 한미 양측은 6월에 회담을 다시 열기로 하고 1차 회담을 끝냈다.

 한국 측은 미국 요구를 반영한 수정안을 마련해 6월 회담에서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2차 한미 간 국제VAN회담은 그해 6월 17일부터 20일까지 미국 워싱턴 DC 미국 무역대표부(USTR)회의실에서 열렸다.

 2차 회담에는 한국 측에서 이인표 통신개방연구단장을 수석대표로, 교체수석대표로 이종순 주미 통신협력관(정통부 국제협력국장, 아태전기통신협의체 사무총장 역임, 작고), 박상기 외무부 통상2과장(현 주제네바대표부 대사), 김창곤 체신부 통신협력과장, 박정열 정보통신업무과장(현 특허청 정보기획국장), 자문위원으로 체신부 장관 자문관인 성극제 박사와 한국통신과 데이콤 실무진 등 8명이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미국 측에서는 낸시 애덤스 미 USTR 아태담당부대표를 수석대표로 한 상무성 관계자 등 8명이 참석했다.

 2차 회담에서 한국 측은 국제VAN시장 개방시기와 범위 등을 놓고 막판까지 고뇌에 고뇌를 거듭했다.

 국제VAN서비스 개방문제는 한국 측이 현재 50% 이내로 제한돼 있는 외국인투자를 오는 1994년 1월까지 전면 개방하겠다는 입장인데 반해 미국 측은 조기개방을 주장해 합의하는데 난항을 겪었다.

 양측은 한국 측 수정안을 놓고 밀고 당기던 진통 끝에 국제VAN서비스 분야에서 타결점을 찾았다.

 한미 양측은 국제VAN개방 협상에서 미국 요구를 한국이 들어주는 대신 완전개방은 한국 측 주장대로 1994년까지 유예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입장은 한국 측이 첫 회담 때부터 막판까지 고수해 이를 관철했다.

 한미 양측은 그해 7월 1일부터 국제VAN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도 합의했다.

 이인학 단장의 회고.

 “대표단은 국가이익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협상에서 접점을 찾아 한미 간 통상마찰을 완화했고, 국제VAN에서 한미 양국이 상호협력 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했어요. 대표단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김창곤 과장의 증언.

 “한국이 선전(善戰)한 회담이었습니다. 미국은 국제VAN 첫 회담 때부터 조기에 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력을 가해왔습니다. 이런 요구를 1994년까지 시기를 늦춘 것입니다. 협상에서 그런 일이 쉽지 않습니다. 미국 측은 국제VAN 개방에 관해 강경 입장이었습니다. 미국통신업체들의 이해가 걸려 있었거든요.”

 언제나 그랬듯 양측 대표단은 국익을 지키기 위해 기(氣)싸움을 벌였고 온갖 전략을 다 구사했다. 실무에 밝고 상황판단력이 뛰어난 이인표 단장은 회담 중 분위기 전환을 위해 중간에 한국 대표단을 회담장 한구석으로 불러 야단을 치기도 했다. 마치 농구팀 감독이 선수단을 불러 작전지시를 하는 모습과 같았다.

 김창곤 과장의 계속된 기억.

 “어느 때는 회담장 뒤편에 병풍처럼 가린 뒤편으로 대표단을 불러 기합을 주고 그랬습니다. 그게 다 협상의 전략이었습니다.”

 한미 양측은 회담이 타결되자 국제VAN 약정안을 만들어 양측 수석대표인 이인표 단장과 낸시 애덤스 부대표가 가(假)서명을 했다.

 이 가서명한 내용은 그해 6월 26일 서한으로 상호교환하기로 합의하고 이런 내용을 한미 양해록(ROU)으로 작성해 교환했다.

 양해록에서 한미 양측은 △한국정부는 이전 협상에서 양국 간에 작성한 양해록에서 약속한 바 있는 전기통신에 관한 사항을 이행하며 △한국정부는 금번 국제VAN약정을 위해 양해록 내용에서 일탈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행하고 이 서신 교환에 의한 서비스 범위는 상기 양해록 사항보다 확대한 것으로 해석하며 △양국 정부는 국제VAN약정과 기존 양해록에서 언급된 과제들을 포함한 현안에 대해 견해차를 해소할 것을 기대하면서 1992년 2월까지 계속 협의를 하고 △미국정부는 본 양해록에 관한 미국정부의 견해를 밝히는 서신을 1991년 6월 26일자로 한국정부에 송부한다는 점을 약속했다.

 한미 양측은 한국의 민간업자가 제공하는 VAN서비스의 종류를 국제 데이터베이스(DB), 데이터프로세싱(DP), e메일 등으로 규정하고 앞으로 개방할 국제VAN 서비스 시작에 필요한 절차 등을 구체적으로 정했다.

 그러나 미처 세부적인 사항까지 합의하지 못한 투자제한과 공정경쟁 보장 등은 별도의 회담을 통해 합의하기로 했고 미국 측 통신망과 접속, 운용하는 기술적인 문제도 추후 재론키로 했다.

 이 무렵, 체신부 장관 자문관으로 한미통신회담에서 핵심역할을 하던 성극제 박사가 2차 VAN회담이 끝난 후 그해 6월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 박사는 초창기부터 한미통신회담에 깊숙이 관여해 회담의제와 대응전략 등을 마련했고 회담장에서 양측의 통역까지 맡았다. 그러다보니 회담과정에서 일화가 적지 않았다.

 회담장에서 한국 측 수석대표가 1분 발언한 것을 5분여로 늘려 통역을 하거나 미국 측 수석대표가 5분여 발언한 것을 1분으로 줄여 통역하는 일도 간혹 발생했다.

 한국 측 수석대표가 발언한 내용이 미진하면 통역이 나서서 바로 잡아 주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그는 한국 측 수석대표가 묻지 않은 미심적은 내용도 대신 깐깐하게 미국 측에 자주 따졌다. 중간에 수석대표의 발언을 자르기도 했다.

 한국 측 대표로 나온 외교부 관계자가 “당신이 뭔데 나서서 수석대표의 발언을 중단하고 발언 내용을 수정하느냐”며 반발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한국 측 수석대표였던 박성득 체신부 통신정책국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이 나서 “성 박사는 단순히 통역만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해 분위기를 가라앉힌 적도 있다.

 미국 측 대표단이 ‘성 박사의 통역이 지나치게 한국 측 이해만 대변하는 것이 아니냐’며 미 대통령 통역을 담당했던 사람을 통역으로 데려 온 적도 있다.

 성 박사의 증언.

 “한번은 미 대표단이 통역을 별도로 데리고 왔더군요. 저야 편하죠. 그런데 미국 대표단이 나중에 저보고 다시 통역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통신 분야에 관한 내용을 모르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회담에서 아는 척하거나 건성으로 협상을 하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의문이 나면 꼭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제가 수석대표의 발언내용에 더 보태거나 빼고 했던 점은 사실입니다.”

 그는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DDA협상대표 등을 지낸 후 1995년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부원장, 원장 등을 역임했다.

 성 박사의 바턴을 이어 받은 사람이 최병일 박사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예일대 경제학 박사로 1989년부터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근무했다. 최 박사는 체신부 장관 자문관으로 12층 장관실 옆 사무실에서 한미통신회담 의제와 대응책 등을 마련하는 등 핵심역할을 수행했다.

 양국의 쟁점 중의 하나였던 국제VAN에 대해 양측이 양해록을 작성함에 따라 양측 대표단의 어깨는 그만큼 홀가분해졌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