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62>양승택 정통부 장관

2001년 3월 24일. 토요일 오후.

양승택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ICU) 총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민주당 대표 역임, 현 국민대통합위원장)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양 총장께서 정보통신부 차기 장관으로 내정됐습니다. 월요일인 26일 오후에 청와대에서 임명장 수여식이 있으니 청와대로 들어오기 바랍니다.”

한 실장은 장관 내정을 통보하면서 “공식 발표 때까지 비밀을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양 총장은 입각 내정을 통보받고 일요일 대전으로 내려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직원 인사를 마무리했다. 양 전 장관의 회고록 증언.

“대학교를 설립해 석사는 배출했지만 박사를 배출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3월 26일 월요일 오전 11시.

김대중 대통령은 정보통신부 장관에 양승택 ICU 총장을, 행정자치부 장관에 이근식 전 내무부 차관(16, 17대 국회의원 역임)을, 과기부 장관에는 김영환 민주당 대변인(현 민주당 의원)을 각각 임명하는 등 12개 부처 장관(급)을 교체하는 대폭 개각을 단행했다.

박준영 청와대 대변인(현 전남도지사)은 각료 인선기준과 배경에 대해 “김 대통령은 능력, 개혁성, 세대와 지역 간 안배, 국민적 평가를 중요한 인선 기준으로 삼았다”면서 “이번 개각을 계기로 국정을 쇄신하고 국정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국민의 정부가 표방해온 각종 개혁 과제들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오후 2시 청와대 본관 2층 세종실에서 신임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김 대통령은 임명장을 준 후 이들과 각각 기념촬영을 했다.

양 장관은 임명장을 받은 후 정통부로 돌아와 이날 오후 5시, 14층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갖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양 장관은 취임사에서 “미국 경제의 급격한 하락으로 체감경기가 위축되고 있지만 정보통신산업 발전이 경제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이라며 “제4세대 통신기술의 집중 개발과 우체국의 새로운 물류 거점화, 정보통신 인력양성에 역점을 두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에 앞서 안병엽 전 장관(현 KAIST 초빙교수)은 이날 오후 3시 이임식을 갖고 정통부를 떠났다. 안 전 장관의 증언.

“당시 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더욱이 IMT2000사업자 선정도 마무리한 상태여서 신광옥 청와대 민정수석(법무부 차관 역임)을 통해 청와대에 `건강이 안 좋다. 사업자도 선정했으니 이제 그만두고 좀 쉬고 싶다`고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김 대통령이 국무회의 전에 저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건강이 나빠진데다 사업자 선정도 끝났으니 새 사람이 와서 일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안 전 장관이 사의를 밝히자 한광옥 비서실장이 후임자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안 전 장관은 정계와 관료, 학계와 기술계로 구분해 후임자 명단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했다. 양승택 ICU 총장은 학계와 기술계 대표로 추천했다.

그는 개각 하루 전인 23일 저녁 박지원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청와대 비서실장 역임, 현 민주당 국회의원) 등 몇 사람과 저녁 식사를 했다.

안 전 장관의 말.

“퇴임하고 한 달쯤 집에서 푹 쉬었습니다. 그런데 ICU 총장으로 가라는 겁니다. ICU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육성하려면 전직 장관이 가야 한다는 겁니다.”

안 전 장관은 그해 4월 23일 공석 중인 ICU 제2대 총장에 취임했다. 이후 그는 17대 총선에서 청와대의 강력한 추천으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 화성에서 출마해 당선했다.

17대 국회에는 안 전 장관 외에 강봉균 전 장관(청와대 경제수석·재경부 장관 역임, 현 군산대 석좌교수), 변재일 전 차관(현 민주당 의원) 등 전직 정통부 장차관 출신 3명이 나란히 입성했다. 안 전 장관은 남들은 한 번 하기도 어렵다는 장관과 대학교 총장, 국회의원 등을 두루 역임했다.

신임 양승택 장관은 한국정보통신 혁명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한 주역이다. 그는 세계 열 번째 기술쾌거를 이룩한 TDX와 세계 첫 CDMA 상용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또 ICU 초대 총장으로 정보통신 인재 양성에 헌신했다.

양 장관은 1961년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해군 전자 장교로 입대, 중위로 예편했다. 해군 복무 시 미국의 METU제도 도입을 해군에 제안, `함대이동전자반`이라는 이름으로 공창에 설치하게 했다. 그는 반장을 맡아 전국 해군기지를 돌며 전자통신 시설을 점검했다.

군 제대 후 삼양전기와 국제융진공사(IDC)에서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6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버지니아공과대학원에서 전기공학 석사를, 브루클린공과대학교대학원에서 전기공학 박사를 취득했다.

1997년 11년간의 벨 연구원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한국전자통신(KTC, 삼성전자 인수) 상무로 근무했다. 당시 사장은 이만영 박사(작고,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한양대 부총장 역임)였다. 이 박사는 서울 공대 출신 미국박사 1호로 양 장관의 버지니아대학 논문 지도 교수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전자과 학생시절 교환교수로 서강대에서 강의를 해 박 대통령의 스승이기도 했다.

양 장관은 1981년 10월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ETRI) TDX 개발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와 관련한 양 장관의 회고록 증언.

“그해 9월 한국전기통신연구소장인 최순달 박사(체신부 장관 역임)가 `나를 TDX 개발단장으로 추천했다며 준비하라`고 했다. 그 후 오명 체신부 차관(체신부 장관·과기 부총리 역임, 현 동부그룹 반도체IT전자총괄부문 회장)이 `교환기 개발은 국가의 중요한 연구 과제니 개발 책임을 맡아 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삼성 상무로 있으니 삼성과 상의해야 한다`고 했다. 오 차관이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며칠 후 이건희 삼성 부회장(현 회장)이 불러 갔더니 `정부에서 양 박사를 원하니 보내드린다. 장기 출장이라고 생각하고 일 끝나면 돌아와 달라`며 연구소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는 1981년부터 TDX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1980년 초만 해도 우리나라는 전화기 설치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전화기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TDX 개발은 세계 열 번째 기술쾌거였다. 초창기 오늘날 `TDX 혈서`로 불리는 서약서를 작성했다.

양 장관의 회고.

“서약서는 `저희 연구단 연구원 일동은 최첨단 기술인 시분할전자교환기 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만약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서약합니다`는 내용으로 제가 작성했습니다. 최순달 소장과 저, 그리고 유완영 교환연구부장(오리온전기 사장 역임), 박항구 교환기기연구실장(현 소암시스텔 회장)이 서명했습니다.”

TDX 명칭과 관련한 양 장관의 계속된 증언.

“1982년 7월 26일 TDX 시험 개통식 날, 당시 최순달 장관과 함께 개통 현장인 송정우체국으로 향하는 차에 동승했어요. 그 때까지만 해도 교환기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공모한 결과, KTX(Korean Time Division eXchange)와 KTD(Korean Time Division Switch)가 가장 인기가 높았습니다. 최 장관께 KTX와 KTD 중 어느 쪽이 좋겠냐고 물으니, 최 장관은 `왜 꼭 K가 들어가야 하느냐, 이것도 일종의 열등감`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K자를 빼고 조합해 TDX(Time Division Exchange)를 제안해 그렇게 정해진 겁니다.”

이후 전자교환기는 TDX로 부르게 됐다.

1985년 10월 제6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TDX-10 개발이 포함됐다. 그는 당시 계획 실무 작성반에 참여했다. 이 계획에 TDX-10 대형 모델 개발을 위한 예산을 넣어야 했다.

얼마를 써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는 TDX-10 개발비는 TDX보다 많은 600억원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했다. 중간에 얼마라도 삭감할 것으로 예상하고 560억원을 산정해 올렸다.

양 장관의 회고록 증언.

“조금 깎일 생각을 하고 써낸 금액이었는데 전액 반영됐다. 나는 산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급히 연구소로 달려와 개발비 산출 근거를 만들어 소장 결재를 받았다. 그 내용을 체신부와 통신공사(현 KT)에 보냈다. 뒷말이 없었다.”

TDX 개발은 오랜 전화 적체 현상을 해소하고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게 했다.

양 장관은 1986년부터 한국통신진흥과 한국통신기술 사장을 맡으면서 6년간 ETRI를 떠났다. 그러다가 1992년 5월 다시 ETRI 소장으로 복귀했다.

당시 윤동윤 체신부 장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은 CDMA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장관직을 걸고 CDMA 개발에 전력투구했다. 윤 장관은 매주 ETRI로 달려가 CDMA 개발을 독려했다. ETRI도 비상이 걸렸다.

양 소장은 업무의 최우선 순위를 CDMA 개발에 두었다. CDMA 연구동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양 소장은 매주 월요일 CDMA 개발 진도를 직접 점검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한국은 세계 첫 CDMA상용화에 성공했다. CDMA 상용화로 이동통신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퀄컴은 CDMA 기술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이에 당시 양 원장은 퀄컴과의 불공정 CDMA기술료 배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ETRI에 퀄컴대책반을 구성했다. 두 차례에 걸쳐 공식 협상단을 퀄컴에 보내 대화를 통한 협상을 모색했다. 그래도 퀄컴이 성의를 보이지 않자 강력한 법적 대응을 지시했다. 이런 대응이 ETRI가 퀄컴을 국제상사중재위에 제소해 승소하는 디딤돌이 됐다.

그는 1997년 4월 ICU 총장으로 내정되면서 ICU 설립 추진단장을 맡아 탁월한 업무 추진력으로 실타래처럼 얽힌 난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ICU 설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초대 총장으로 ICU를 정보통신 인재 산실과 IT 분야 특성화 대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온 힘을 다했다. 1년 3학기 전일제 수업으로 교과 이수 기간을 단축시켰다. 또 경영을 아는 기술인력, 기술을 아는 경영인 양성을 위해 공학부는 경영과목을, 산업경영학부는 공학과목을 필수로 수강하도록 했다. 교수들도 9시 이전에 출근하도록 규정을 엄격히 적용했다.

그동안 체신부와 정통부 산하 기관장으로 정부 정책을 지원하거나 정책 집행자로 일해 온 그에게 정책 결정권자인 장관자리는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