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지구에서 가장 멀리 보낸 인공 물체. 보이저 1호는 지구로부터 306억km 떨어진 곳에서 우주 공간을 날아가고 있다. 빛의 속도로 가도 38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보이저 1호가 2030년까지는 지구와 통신할 수 있으리라 내다본다.
그런데 만약 우주에 흩어져 있는 작은 먼지와의 충돌로 보이저 1호의 안테나에 손상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발전기가 여전히 쌩쌩히 돌아가는 데도 보이저 1호는 '벙어리'가 되고 말 것이다. 태양계를 벗어난 보이저 1호의 안테나를 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인류에게 없다. 만약 보이저 1호에게 최근 각광 받고 있는 자가치유 금속이 쓰였다면 작은 충격이나 상처쯤은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연에서 배운 '자가치유' 소재
자가치유 소재란 균열이나 상처가 저절로 회복되는 금속을 말한다. '자가치유'라는 개념은 자연에서 왔다. 사람을 비롯해 많은 생물들이 상처가 생겨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치유된다. 금속 외에도 고분자물질, 세라믹 등 자가치유능력을 가진 재료가 근래 들어 다양해졌다. 세계적인 시장조사 전문기업 '마켓 앤 마켓'은 자가치유 소재 세계시장 규모가 2021년까지 24억4700만 달러(한화 2조 7332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자가치유 소재를 쓸 수 있는 곳은 보이저 1호와 같은 우주 탐사선 외에도 다양하다. 첨단 분야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바꿀 수 있다. 가령 일본 자동차회사 닛산은 외부충격으로 생긴 흠집이 저절로 사라지는 '자가치유 페인트'를 2005년 개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2010년 국내 업체도 유사한 페인트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특수도료 전문업체 한진화학이 개발한 페인트는 열을 가하면 손상된 부분이 고쳐진다. 주차 중 실수로 생긴 자동차 표면의 스크래치나 '문콕'으로 인한 상처를 굳이 공업소에 맡기지 않고도 손쉽게 고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는 얘기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표면에 생긴 스크래치가 저절로 고쳐지는 자가치유 소재에 대한 연구도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김도향 연세대 신소재공학과 교수 연구팀은 우리가 생활하는 상온에서 자가치유 기능이 작동하는 소재 연구에 뛰어들었다. 스크래치 정도는 스스로 회복하고 구겨져도 다시 펴지며 평면뿐 아니라 곡면 형태를 구현할 수 있는 합금을 개발하는 것이 목적이다. 삼성전자 미래기술육성센터의 지원으로 시작된 김 교수팀의 연구는 신개념 전자기기 외장재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스스로 복구되는 아스팔트?
도로를 덮는 아스팔트에도 자가치유 소재가 쓰이게 될 전망이다. 아스팔트 도로는 그 위를 달리는 차들로 인해 24시간 쉴 틈 없이 파손된다. 과적 차량이라도 지나가면 파손되는 속도는 더 빨라진다. 신고를 받으면 도로교통공단이 수리에 나서지만 도로 전체를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릭 슐라젠 네덜란드 델프트공대 교수팀은 자가치유 소재를 사용한 아스팔트를 구현할 수 있음을 보였다. 기존 아스팔트 물질 사이에 철이나 구리 등 금속으로 만든 가느다란 전도성 섬유를 넣은 뒤 도로가 파손되면 포장 노면 위로 고주파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자기장 때문에 전도성 섬유가 열을 내면 아스팔트가 유체와 같은 성질을 띠게 되며 서로 다시 달라붙는 원리를 이용했다.
홍영근 수원대 신소재공학과 교수 연구팀은 분자간결합력이 큰 고분자를 아스팔트에 섞는 방법으로 자가치유 능력을 가진 아스팔트를 만들었다는 연구결과를 2014년 한국고무학회에서 발행하는 'Elastomers and Composites'에 발표했다. 아스팔트 사이에 끼어들어간 고분자 덕분에 강도는 18% 더 강해지고, 충격 때문에 미세균열이 생기더라도 다시 강도를 회복하는 치유능력을 보였다.
◇세월에도 약해지지 않는 금속 만들 수 있을까
자가치유 금속은 피로파괴 위험성이 있는 곳에 사용된 기존 금속을 대체할 수도 있다. 다리나 선박에 사용된 금속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도가 약해져 쉽게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금속의 자가치유는 고분자물질보다 까다롭다. 치유 속도가 매우 더딜뿐더러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가 필요하다. 합금에 붕소(B)를 첨가하면 균열에 저항하는 강도를 높일 수 있다. 정확한 메커니즘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붕소가 금속 내 구멍이 생기는 미세공동의 생성을 막는 것으로 추측된다.
마이클 뎀코비치 미국 매사추세츠주 공대(MIT) 교수팀은 금속 내부에 나노크기의 결정 입자들을 만들어 자가치유 능력을 갖게 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전자현미경으로 금속 내부를 살핀 결과 충격 때문에 생긴 미세한 균열로 결정 입자들이 이동하며 균열을 메우는 것이 관찰됐다. 연구팀은 “미세한 균열이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큰 균열이 되며 강도를 크게 떨어뜨리게 되는데 연구결과를 응용하면 미세한 균열이 커지기 전에 스스로 치유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세월이 가도 강도가 약해지지 않는 금속을 만드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할 것”이라 덧붙였다.
샤샤 장 네덜란드 델프트공대 교수 연구팀은 금속 내부에 나노입자인 금 원자를 일부 포함시켜 자가치유가 가능해지도록 하는 방법을 선보였다. 균열이 생기면 유동성이 큰 금 원자가 이동해 균열을 메우는 원리를 이용했다.
◇자가치유 돕는 나노물질
자가치유 소재의 핵심 기작에서 나노물질의 활동을 빠트릴 수 없다. 위의 사례처럼 나노입자가 직접 자가치유를 일으키기도 하고 각종 부식방지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거나 보관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최근 5년새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나노입자를 포함한 메조기공 물질을 이용한 연구 또한 나노기술을 자가치유 소재에 응용한 사례다. 메조기공 물질이란 나노크기(10억 분의 1m)보다 큰 구멍을 가진 물질을 말한다. 메조기공 물질에 특정 나노입자를 붙이면 부식방지제를 저장할 뿐 아니라 코팅표면과 부식방지제가 불필요한 접촉을 하지 않도록 해 스스로 부식을 막는 자가치유 성능을 장기간 보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2014년에는 셀룰로오스 나노섬유를 부식방지제인 질산칼슘의 운반자(carrier)로 활용해 에폭시 코팅이나 탄소강의 부식을 막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 밖에도 부식의 원인이 되는 수분 접근을 막기 위한 발수코팅, 각종 부식방지에도 다양한 나노 입자가 쓰이고 있다.
글 : 이우상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