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우아한 자리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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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시간·공간적 비움과 채움의 반복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곤 한다. 20여년 전 필자의 독일 유학 시절을 더듬어 보니 독일인 박사 과정 학생과 일부 유학생은 일반 근로자처럼 월급에서 세금도 내고 연차를 보장받았지만 대부분 유학생은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 장학금을 받았고 공식적인 연차를 보장받지는 못했다. 다만 지도교수 허락 하에 매년 일정 기간 랩에서 떠날 수 있었는데 그때 나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다녀오곤 했다. 자리 비움을 통해 가능했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남을 통한 채움은 연구 활동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재영 GIST 교수.
<이재영 GIST 교수.>

2007년 광주과학기술원(GIST)에 부임했을 때 대학원생에게는 독일 유학생과 마찬가지로 연차휴가 제도가 따로 없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연구실 소속 대학원생들에게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기간에 1주일씩 재량휴가를 쓸 수 있도록 했다. 휴가라는 단어는 설렘과 부담감을 동시에 갖게 하지만 일상에서 벗어나는 소소한 일탈은 모두에게 설렘의 감정으로 더 크게 다가온다. 어느 해에는 모두 같은 시기에, 다른 해에는 원하는 시기에 연구실을 잠시 떠났다가 돌아왔다. 그들에게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돌아온 그들의 환한 얼굴을 보았을 때 내가 느꼈던 충전 에너지를 그들도 갖고 돌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군복무 대상인 박사과정 대학원생이 전문연구요원으로 편입을 한 후에는 연차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근로자에 준해서 근태관리를 받고 있고 매년 10일 연차휴가와 병가, 사가, 공가를 복무규정에 따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문연구요원 외 석·박사 대학원생에게는 연차제도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 가지 의구심이 생겼다. 내가 지금까지 임의적으로 진행해온 명목상 휴가에는 문제가 없을까? 연차휴가가 없는데 일정기간 근무하는 공간을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 독일에서야 교수 권한이 명확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나의 한국 방문이 가능했던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러한 소심하고 소박한 일탈에 대한 책임 소재를 물었을 때 문제 소지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독일은 연구기관 경력증명서도 교수 편지에 기간과 역할을 기술한 후에 사인만 하면 공문서가 된다. 우리가 일정규격에 지도교수가 아닌 기관장 직인이 있는 문서를 사용하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문득 이공계 대학원생의 생활을 생각해 보았다. 아침에 연구실에 출근해서 계획하고 맡겨진 일상 업무를 수행하고 각자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연구개발을 위한 실험과 계산 등 작업이 일반 직장인처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안에 모두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자정을 지나 새벽까지 진행되는 일도 있고 이른 오후에 마무리돼 여유로운 멈춤이 간혹 있을 수 있다. 아무리 흥미로운 연구주제에 좋은 결과를 관찰한다고 해도 이런 생활의 반복은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지치게 하고 지루하게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이 시점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휴식, 다시 말해서 휴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대학원생에게는 공식적인 연차휴가가 없다. 이들 입장에서 지도교수는 스승이고 동료일 수 있지만 때때로 막연히 멀고 말하기 어려운 존재로 느껴진다. 이들이 휴가가 필요할 때 과연 어떻게 맡고 있던 일을 눈치 보지 않고 잠시 중단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고민스러울 것이다. 물론 매학기를 마치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있으나 이공계의 연구개발 과정 특성상 이들의 멈춤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정부와 소속 연구실 지원을 받고 생활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방학 내내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 생각과 고민 끝에 난 대학원생들에게 여름방학 휴가, 겨울방학 휴가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하고 있다. 대신 랩 구성원의 일정표에 자리비움으로 표기한다. 왠지 자리비움은 상점 문 앞의 문구처럼 아주 잠시 외출하는 느낌이 있다. 이러한 생각과 접근이 다소 소심하지만 그들의 명확한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한 나만의 최선의 선택이다.

최근 GIST, 한국과학기술원(KA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등 4대 과기원은 대학원생과 근로 계약 대신 스티펜드(Stipend)라는 제도를 도입해 석·박사 과정 대학원생이 학업 및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일정 액수 생활금을 지원하고 있다. 더불어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가칭) 대학원생 연차제도(POSH·POst-graduate Students Holidays) 도입을 제안한다. 웃음을 잃지, 잊지 않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스스로 멈출 수 있는 분위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재영 광주과학기술원 지구·환경공학부 교수 jaeyoung@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