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21>해외 과학자 찾아 10만리

1970년 1월 9일 KIST 광장에 모인 최형섭 초대 소장(앞줄 왼쪽 세 번째)과 초기 연구원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1970년 1월 9일 KIST 광장에 모인 최형섭 초대 소장(앞줄 왼쪽 세 번째)과 초기 연구원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사람이 곧 경쟁력이다. 이는 고정불변의 진리다. '과학기술 군주'로 불리는 조선 세종대왕은 “인재는 천하 국가의 지극한 보배”라고 말했다. 세종은 즉위 후 집현전을 설치해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천하 인재를 등용했다. 그 결과 1443년 한글을 창제했고, 우리 역사에서 과학기술이 가장 융성한 시대를 열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는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했다. 인재 없이는 천하를 도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1966년 2월 화려하게 출범했지만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가장 시급한 숙제는 낙후한 한국 과학기술을 화려하게 꽃피울 과학자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연구원 확보 방안을 놓고 고심을 거듭하다 해외에 있는 한국인 과학기술자를 유치하기로 결심했다. 생산업체와 연계해 계약연구를 하려면 경험이 있고 유능한 연구자를 찾아야 했지만 당시 이런 조건에 맞는 과학기술자는 국내 대학교 교수들뿐이었다. 이들을 데려오면 당장 대학 교육에 큰 지장을 줄 수 있었다. 내 집 잘 짓자고 남의 집 기둥을 빼내어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제기획원도 그해 8월 연구소 연구원 충원계획에 따라 우선 연내에 75명을 선발하고, 그 가운데 30여명은 해외 과학자로 충당한다고 밝혔다. 1950년대 해외로 유학 간 사람들 가운데 연구소 기준에 부합한 해외 과학자가 많았다. 관건은 이들을 어떤 조건으로 데려오느냐 하는 것이었다.

최형섭 소장의 회고록 증언. “우선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연구 자율성을 확립해 주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안정성을 보장하며, 제대로 된 연구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도 중요하지만 자신들이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한 다음 생활 안정을 보장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을 마련해 주고, 당시 국내에는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과 계약해서 적용받게 했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연구소 측이 해외 과학자들에게 제공키로 한 의료보험 혜택은 당시 파격 대우였다.

최형섭 소장은 해외 과학자 유치를 위해 바텔기념연구소와 의논해 연구소를 소개하는 영문 책자를 만들었다.

영문 책자에는 연구소 조직과 연구원 채용 요강, 교육 훈련계획, 연구조사 계획, 시설 내역, 이사회 구성, 재정 상황, 부록으로 연구소 구성원 등을 소상히 담았다. 책자만 봐도 마치 손금 보듯 연구소 현황을 샅샅이 알도록 만들었다. 해외 과학자들의 관심도를 높이기 위해 바텔기념연구소가 자매기관이라는 점도 책자 표지 하단에 큰 글씨로 넣었다.

연구소 측은 바텔기념연구소의 협조를 받아 이 책자를 미국 내 주요 연구기관과 대학, 유럽 연구소 등에 근무하는 800여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 보냈다.

책자를 보낸 연구소 측은 과연 몇 명이나 응모할지 내심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해외 연구소와 대학에 근무하는 과학자 500여명이 응모 신청을 해 온 것이다.

연구소는 신청자 대상으로 서류심사를 해서 1차로 150여명을 선정했다. 연구소는 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분야별 우선순위를 정해 2차 심사를 거쳐 78명을 선정했다.

그해 10월 17일.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은 유능한 해외 과학자 유치를 위해 2개월 일정으로 미국과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

최형섭 소장은 미국 워싱턴DC, 뉴욕, 시애틀, 로스앤젤레스, 컬럼버스, 솔트레이크시티 등 6개 도시를 다니며 서류 전형에 합격한 과학자들을 만나 심층면접을 했다. 주말도 없고, 밤낮이 없는 강행군이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측은 사전에 작성한 면접 리스트에 따라 한 사람씩 한 시간여에 걸쳐 심층 면접을 진행했다. 면접장에는 바텔기념연구소 측 과학자 3명도 참석해 송곳 질문을 했다.

최형섭 소장이 미국에서 만난 과학자는 모두 69명이었다. 박사 49명, 석사 23명, 학사 6명 등이었다. 최형섭 소장이 면접한 과학자를 분야별로 보면 화학, 금속, 기계, 전자, 화공, 식품, 토질역학, 물리, 경제, 회계, 컴퓨터, 광업, 조선, 제약, 건축재료 등이었다.

최형섭 소장은 이들에게 국내 산업의 실태와 문제점을 분야별로 제시하고 각자 원하는 과제에 대해 연구계획서를 제출토록 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측은 바텔기념연구소의 협조를 받아 이 연구계획서를 검토한 후 3차 면접을 거쳐 최종 합격자를 이듬해 10월에 발표했다.

최형섭 소장은 그 후 추가로 35명을 선발, 바텔기념연구소로 연수를 보냈다. 이들 가운데 벨연구소에서 근무한 한 사람이 이의를 제기했다.

“왜 하필이면 벨연구소보다 급(級)이 낮은 바텔기념연구소에서 연수를 받아야 합니까?”

최형섭 소장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러분을 바텔기념연구소로 연수를 보내는 것은 여러분의 전문 분야 지식을 보강하려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장사할 것인지를 배우려는 것입니다. 어떻게 연구계획서를 작성해야 기업체에서 연구과제를 따올 수 있느냐를 배워야 합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당장 해야 할 일에 관한 연구는 학문 연구가 아니라 기업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연구소 운영비 충당을 위한 전략 차원이었다. 그러나 해외에서 학위 받은 과학자들은 학문연구를 하는 것만 선호했다.

최형섭 소장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당면 과제는 “사회와 기업이 원하는 기술개발과 학문연구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라고 해외 과학자들에게 강조했다.

최형섭 소장은 면접자들이 지칠 정도로 질문을 반복했고, 현안에 관해 면접자들과 심층토론을 진행했다. 면접자를 세 번씩 불러 질문하고, 그들이 답한 내용을 재확인했다.

어느 날 제자 한 명이 같은 내용을 계속 확인하는 최형섭 소장에게 “저를 그렇게도 못 믿으십니까” 하며 서운한 마음을 내색했다.

“지금 한국에서는 연구자가 좋아하는 연구만 하기는 곤란하네. 기업에 도움을 주는 연구, 이른바 계약연구를 해야 하네. 혹여 그런 내용을 잘못 알고 귀국했다가 나중에 '못하겠다'고 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이런 일을 해도 괜찮겠다'는 확답을 받으려고 이러는 것이네.”

최형섭 소장이 연구원 채용에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것은 이들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 인재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귀국했다가 고국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개인은 물론 외국 과학자 유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해외 과학자 유치 과정에서 감동적인 일도 있었다.

당시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로서 미국에서도 '천재' 소리를 듣고 있던 이휘소 박사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일하고 싶다는 편지를 최형섭 소장에게 보내왔다. 이휘소 박사는 당시 나이 31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를 거쳐 뉴욕주립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최형섭 소장이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 “세계적인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가 연구소에서 일해 보겠다는 편지를 내게 보냈다. 반가웠지만 나는 '한국인 최초 노벨물리학상 대상자인 이 박사는 한국에서 기초과학 연구를 할 것이 아니라 미국에 더 머물면서 연구를 하는 게 좋겠다'는 내용으로 회신을 보냈다. 이 박사는 내게 다시 편지를 보냈는데 '박사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기초연구를 할 수준이 되면 반드시 저를 먼저 불러 주십시오'라고 했다. 나는 '이처럼 합리적이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과학자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이 박사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과학자였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에 가까이 다가가던 이휘소 박사는 1977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했다. 고국에서 기초연구를 하고 싶다는 그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197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압두스 살람은 “이휘소는 현대 물리학을 10여년 앞당긴 천재다.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이휘소 박사는 2005년 과학기술인 명예의전당에 헌정됐다.

미국 유타대에서 진행한 과학기술자 면접은 한밤중에 이뤄졌다. 유타대에서는 우리나라 1호 화학 박사이자 노벨상 후보에 오른 세계적인 석학 이태규 박사와 이용태 박사, 천병두 박사 등이 최형섭 소장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이태규 박사가 최형섭 소장에게 말했다.

“이제 가 보셔야죠?”

“예? 어디로 갑니까.”

이태규 박사가 최형섭 소장이 밤에 연구하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연구원들에게 '집에 가지 말고 남아 있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태규 박사는 유타대에 유학 온 한국인 학생, 교직원 등 50여명에게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소개하고 한국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귀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형섭 소장은 이어 환한 전등불 아래에서 연구원 대상으로 한밤중 면접을 진행했다. 이 자리에는 미국인 학자들도 참석하는 등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밤중인 데도 환하게 불을 밝힌 연구실 모습은 최형섭 소장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전자신문 창간발행인 김완희 박사는 미국 컬럼비아대 전자공학부 교수로 있던 당시를 떠올리며 “미국 내 한국인 과학자들이 몸은 고국을 향해 서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 전자산업 대부로 불리는 김완희 박사는 훗날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으로 귀국해 한국 전자산업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해 12월 17일. 최형섭 소장은 2개여월 미국 방문을 마치고 이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최형섭 박사는 “면담한 해외 과학자들과의 최종 계약 여부는 내년에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에 나가 있던 유능한 과학자를 한꺼번에 유치한 일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국내 처음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