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DX문화살롱](2)디지털 대전환에 왜 평등이 필요할까

[이상직 변호사의 DX문화살롱](2)디지털 대전환에 왜 평등이 필요할까

프랑스 낭시대 생쥐 실험이다. 6마리씩 가두고 물을 건너야 먹이를 구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4가지 행태가 나타났다. 2마리는 다른 쥐가 먹이를 구하기를 기다렸다가 뺏어 먹었다. 다른 2마리는 헤엄쳐서 먹이를 구하지만 다른 쥐에게 뺏기고, 그들의 찌꺼기를 먹었다. 또 다른 1마리는 먹이를 직접 구했고, 뺏기지 않았다. 마지막 1마리는 빈둥거리다가 다른 쥐가 남긴 부스러기를 먹었다. 같은 성향을 보이는 쥐 6마리를 모아 한 우리에 넣어도 4가지 행태로 나뉘었다. 권력자의 비애일까. 스트레스는 다른 쥐를 착취한 쥐가 가장 높았다. 각자의 목표가 있을 뿐 공동 목표는 없다. 그래서 그들의 불평등은 당연하다. 사람도 그래야 할까.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1755년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썼다. 자연에선 정신적·신체적 능력에 따른 차별만 있다. 공동체를 만들며 신분과 지위, 경제력에 의해 불평등이 발생하고 법률·소유권을 통해 유지된다. 우리는 조선시대까지 신분사회였다. 백성이 애써 경작한 곡물을 분배해서 살아가는 폐쇄사회였다. 수입원인 백성을 통제해야 하니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자연스럽다. 충성을 끌어내기 위해 교육도 질서유지를 위한 유교경전 암송이 거의 전부다. 과학기술·상공업 인재를 방치해 국가손실이 컸다. 외세침략에도 취약했다. 지배층의 나라이니 백성이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없다. 그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나섰을 뿐이다. 불평등이 신분제로 굳어진 나라에서 열심히 일할 의욕이 있을 수 없다.

평등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구한말 이후 신문물에 기댄 외세의 침략이 거세지고 옛 방식으로 나라를 지킬 수 없었다. 신분제를 유지하면서 백성의 단결을 요구할 수 없다. 산업화시대도 마찬가지다. 노동력 등 국민역량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평등을 강조했고 학교에선 같은 교육과 교복, 급식을 양산했고 학교 건물도 무미건조한 아파트 모습이다. 주거도 마찬가지. 아파트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거의 비슷한 모양이다. 아파트에 산다면 평등해 보였다. 평수나 인테리어는 그다음 문제다. 커피가 잘 팔리면 커피가게가 우후죽순 생긴다. 닭튀김이 잘 팔리면 치킨가게가 우후죽순 생긴다. 남과 같으면 결과가 나빠도 불만 없는 사회다. 평등의식은 높아졌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론 평등하지만 격차는 심해지고 박탈감은 커졌다. 여기서 디지털 대전환이 가능할까. 실질적 평등 없인 어렵다.

현실은 어떤가. 정부와 기업이 디지털 대전환을 주도하고, 언론·전문가는 연일 데이터, AI, 메타버스, 블록체인을 떠든다. 코로나19 팬데믹 환경에서 축적된 자본을 집중 투하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대전환의 참여 주체로서 노동력을 공급하고 상품을 소비해야 할 국민은 시큰둥하다. 코로나19로 고통받는 그들 입장에선 정부와 기업만의 잔치로 읽힌다. 국민역량을 결집하자면 진짜 평등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실질적 평등은 무엇인가. 정부가 제시했던 평등 기준은 불신받고 있다. 특히 부동산, 금융 등 경제 영역에서 격차가 커지고 있다. 표현의 자유로 대변되는 인터넷의 영향으로 국민 각자가 생각하는 평등의 의미도 다양해졌다. 군 복무 등을 둘러싼 남녀 갈등, 일자리를 둘러싼 노소 갈등이 그것이다. 그 결과 상속, 학연, 지연, 업연 등 과거 방식에 집착하고 자원배분을 더 왜곡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평등은 타인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고 소통, 신뢰와 배려를 통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다르지만 같을 수 있고 디지털 대전환을 이뤄낼 수 있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인류문명 시작의 증거를 '부러졌다 붙은 다리뼈'라고 했다. 다리가 부러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누군가 옆에서 치유될 때까지 도왔으니 그것이 문명의 시작이다. 그렇지 못하는 순간 문명의 종말이다. 디지털 대전환의 주역이 될지 낭시대 실험실의 쥐처럼 살지 선택은 자명하다. 그 답은 평등 인프라에 있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국가지식재산위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