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과학기술과 대통령의 역할

백철우 덕성여대 교수
백철우 덕성여대 교수

지난해 1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수학자이자 유전학자인 에릭 랜더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를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 실장으로 내정하면서 보낸 서신이 언론에 공개돼 화제가 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과거 루스벨트 대통령의 과학기술정책이 미국의 경제와 안보에 기여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에릭 랜더 교수에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질문을 던졌다. △팬데믹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기후변화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과학기술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중국과의 경쟁 속에서 미국은 어떻게 미래 산업의 세계 리더가 될까 △과학기술의 열매를 어떻게 전체 미국인과 공유할 것인가 △미국 과학기술의 장기적 건강은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핵심 국정과제에서 과학기술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묻는 바이든 대통령의 질문은 간결하면서도 과학기술의 역할과 지향점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한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에 자부심을 가진 필자도 이 순간만큼은 미국이 부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5월 10일 새 정부가 임기를 시작한다. 정치 공방이 치열했던 대선 기간에 과학기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반도체, 이차전지, 의약품 공급망 등을 둘러싸고 전 세계가 각축을 벌이는 동안 대선 후보들의 연설과 TV 토론에서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 잘 보이질 않았다.

당선인의 공약집은 '과학기술 선도국가' 부문에 과학기술 5대 강국, 디지털 경제, 4차 산업혁명, 기초과학, 국가 연구개발(R&D) 설계 개편, 메타버스, 우주개발 등 7개의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중요한 내용이 대부분 포함돼 있지만 기시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과학기술을 별도 부문으로 제시했다는 것을 과학기술을 그만큼 강조했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과학기술을 그들만의 벽 안에 가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감염병 대응체계, 규제혁파, 중소벤처기업 육성, 산업정책, 국방, 탄소중립 등 모든 부문에서 과학기술이 해야 할 일이 산적하다. 현재의 복잡다단한 경제·사회 체제 아래에서 기존의 영역별 과학기술 정책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국가적 어젠다 해결을 위해서는 기술개발을 넘어 규제, 산업, 조세, 교육 등 범부처적 문제 해결이 필수다.

현재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체제가 최적의 거버넌스인지 다시 한번 고민할 시점이다. 과기부는 부처 간 칸막이로 인해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등과 업무 영역 충돌이 빈번히 발생한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도 대통령이 의장직을 겸하지만 상시적인 행정조직이 아닌 회의체 조직이다 보니 관련 부처의 참여도 저조하고, 실행력이 담보되지 않은 계획들을 양산한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과학기술을 강조할수록 오히려 과학기술의 범위가 협소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과학기술이 특정 부처의 전유물처럼 인식될수록 과학기술의 도구적 역할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우리의 과기부 같은 부처가 없다. 그 대신 대통령 직속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와 그 사무국인 과학기술정책실(OSTP)을 중심으로 전 부처의 정책을 과학기술의 관점에서 조율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과학기술정책실장을 장관급으로 격상하면서 정책 조율 기능에 더 힘을 실었다.

새 정부는 과학기술을 국정 전반에 어떻게 녹여 낼 수 있을지 묘안을 찾아야 한다. 과학기술이 특정 부처의 고유 기능이 되기보다는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조율하는 범부처적 문제 해결 도구가 돼야 한다. 더 나아가 바이든 대통령이 에릭 랜더 교수에게 보냈던 서신처럼 당선인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과학기술이 임기 5년간 풀어 가야 할 문제와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해 주길 바란다.

백철우 덕성여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chulwoo100@duk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