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계속 불고 있다. 봄꽃이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지만 벤처투자시장은 여전히 한기로 서늘하다. 실적 부진과 경기침체로 미국의 빅테크 기업이 18만명을 해고했다는 소식에 이어 실리콘밸리뱅크(SVB)그룹의 파산 소식까지 멀리서 들려온다. 국내 벤처투자 생태계 역시 유니콘 상장, 대규모 투자 유치 같은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그나마 곳간을 채운 기업이 아니라면 겨울의 추운 터널을 벗어나긴 어려워 보인다.
나라 안팎이 SVB 파산으로 시끄럽다. 미국 정부의 발빠른 조치로 시스템 전반으로의 확산 공산은 크지 않다는 게 금융권 안팎의 시각이다. 외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의 기준금리 인상이 이번 달에는 없을 거라는 데 안도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다만 그동안 고성장을 이어 오던 기술기업의 자금 조달 여건이 악화할 것이라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국내 벤처투자 생태계 역시 마찬가지다. SVB 파산 사태에 따른 피해 사례는 아직 눈에 띄지 않지만 가뜩이나 냉각된 투자심리가 더욱 얼어붙고 있다. 벌써 3월도 중순을 달리고 있지만 여태 올해 첫 투자도 개시하지 않은 벤처캐피털(VC)이 대부분이다. 투자자 다수는 투자 시점을 저울질하며 관망하고 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2월 신규 투자 역시 지난해에 비해 75% 줄었다.
더 큰 문제는 벤처투자시장을 둘러싼 환경 변화다. 지난 2년 동안 벤처·스타트업의 기업가치가 급등하자 벤처펀드 결성도 급증했다. 벤처·사모투자가 주식이나 채권 등 전통자산 대비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인식 확산 영향이 크다. 실제 지난 2년 사이 주요 금융지주사들은 일제히 VC를 인수하는 등 벤처투자 조직을 갖췄다. 지난해 말 들어서면서 신규 벤처투자 증가세는 꺾였지만 신규 벤처펀드 결성이 최대치를 기록한 배경이다.
SVB 파산 사태는 벤처투자가 단순 고수익 자산이 아니라 고위험 모험투자라는 인식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 계기가 됐다는 게 투자업계 안팎의 시선이다. SVB와 유사한 사업모델을 보유한 시그니처뱅크, 실버게이트 등 가상자산 전문 은행의 폐쇄 역시 마찬가지 이유다. 국내 출자자 역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고수익 자산보다 안전자산으로의 투자 선회 방식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짙다.
이처럼 시장 참여자가 급증하고 거품이 빠지는 동안에도 우리 생태계의 인프라는 여전히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복수의결권 도입, 투자조건부 융자 등 창업자 지분 희석 방지 장치 마련은 물론 기업공개(IPO) 시장에 집중된 회수시장을 개편할 논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위기가 눈앞에 다가온 지금이야말로 민간 주도의 생태계 전환과 같은 공허한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벤처생태계를 탄탄하게 다질 토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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