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387〉행간에 숨긴 혁신

행간(行間). 어느 사전은 글의 줄과 줄 사이 또는 행과 행 사이라고 설명한다. 이어 이렇게 설명한다.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그 글을 통해 나타내려던 숨은 뜻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실상 이 단어에는 부족함이 있다. 왜냐하면 심지어 마침표와 그 다음 첫 음절 사이의 그 한 칸의 띄움에 긴 시간과 사건의 전개과정 그리고 사건의 맥과 심지어 가슴 찡한 본질이 숨겨져 있기도 한 탓이다.

혁신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 그토록 많은 기록이 있으니 그럴 법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그렇다. 소니는 이것을 최초 상용화한 기업으로 기억된다. 소니 공동창업주 이부카 마사오(Ibuka Masaru)가 1953년 즈음 개발을 시작한 건 사실이지만, 정작 첫 제품은 I.D.E.A.란 기업이 1954년 11월 즈음 시판해 꽤 성공한 리젠시(Regency)의 TR-1인 듯 싶다. 물론 모든 역사가 그렇듯 기업사도 승자 편인 듯 왕관은 TR-1의 바로 다음 줄을 차지한 소니 것이 되었지만 TR-1이야말로 진정 흥미진진하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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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이렇다. 벨연구소는 1947년 트랜지스터를 개발한다. 이와 무관하게 지층 관측 서비스를 하는 GSI란 기업이 있다. 1951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로 사명을 바꾼다. 유정개발에 전자관측장비로 꽤나 알려져 있었지만 트랜지스터에 관심을 갖는다. 벨에서 기술 라이선스를 받아 상용화에 성공한다. 하지만, 출시하고 보니 전자회사들이 별반 관심이 없었다.

이즈음 I.D.E.A.도 이름을 놓고 고민스러웠다. 풀어쓰자면 '산업개발엔지니어링협회'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다 우연히 담배갑에서 찾은 이름이 리젠시였다. 얼마 뒤 회로 설계를 해내고 텍사스 인스트루먼트가 트랜지스터와 재정을 대기로 한다. 이렇게 1954년 10월 TR-1이 출시된다. 가격은 49.95달러, 요즘이라면 500달러는 넘는 가격이었지만 꽤나 팔려나간다. 하지만, 생산량을 높이기 만만치 않았다. 거기다 이윤도 제자리걸음을 했다.

그즈음 동경통신공업이란 일본기업이 TR-55를 내놓는다. 29.95달러에 더 경량에 더 작고 음질도 나았다. 자신의 첫 수출품이기도 했던 이것으로 1955년 출시 첫 해 50만대 넘게 팔린다. 1958년 사명을 바꾼다. 누군가 “비로소 미국 소비자들이 발음할 수 있게 됐다”라고 표현한 그 이름이 소니였다. 이후 리젠시도 매해 걸러 새 제품을 내놓는다.

하지만, 소니는 수많은 공정혁신을 이루고 얼마 뒤 트랜지스터마저 자체 생산한다. 소니가 1957년 TR-63라는 포켓 라디오를 출시하자 명성은 옮겨간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I.D.E.A는 1962년 파산하고, 리젠시 브랜드도 1964년을 끝으로 단종된다.

이런 구절을 읽은 적 있다. 사막을 넘어 나그네가 낙타 여러 마리를 끌고 우물가에 다다른다. 거기엔 한 소녀가 물을 긷고 있었다. 물을 청하자 나그네에게 물을 내어준 다음 낙타에게도 골고루 물을 길어준다. 나그네는 답례로 금팔찌를 줬다는 스토리다. 이 글이 한동안 이해가지 않았다. 물 값 치고는 너무 후한 탓이었다. 하지만 목마른 낙타가 한번에 100리터를 마실 수 있다는 걸 알고서 비로소 빈 칸이 채워졌다. 소녀는 우물에서 물을 퍼 단지에 지고 구유까지를 적어도 수십 번 반복했던 것이었다.
TR-1과 TR-55 사이 공란 한 칸은 왜 주역이던 I.D.E.A.가 실패했고 변방의 소니가 성공했는지 그리고 왜 기업을 하는 당신이 혁신이란 한 단어에 진심이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물론 당신이 관심을 줄때야 자신의 속내를 풀어놓겠지만 말이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