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멕(imec)에 근무하는 한국인 연구원들은 '한국형 아이멕'이 진정한 성공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장비 투자나 물리적 인프라 확보에 그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 연구자 중심의 자율성 보장, 그리고 협업을 장려하는 수평적 시스템 구축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멕의 특징 중 하나는 실패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김재남 브뤼셀 자유대(VUB) 박사과정 연구원은 “아이멕에서는 실패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며 “오히려 실패를 학습의 기회로 간주하고 조직 전체에 공유해 집단 지식으로 활용한다”고 말했다.
정용빈 아이멕 연구원 역시 “아이멕이 추구하는 목표는 단순한 기술 개발이 아니라 노하우의 축적”이라며 “정량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그 과정에서 얻은 기술적 통찰을 더 큰 성공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실패를 문제로 규정하지 않고 자산으로 전환하는 문화는 연구자들에게 자유로운 실험과 도전을 가능하게 한다.
연구 환경의 개방성과 자율성도 눈에 띈다. 김재남 연구원은 “아이멕 박사과정은 주제가 정해진 상태에서 지원자가 관심 있는 분야를 선택할 수 있다”며 “덕분에 본인의 흥미와 전문성에 맞춰 연구를 주도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양한 전문가들과의 협업도 독려한다. 기술 세미나와 워크숍을 통해 연구 결과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국제 학회나 분야별 미팅에서 글로벌 인재들과 소통하며 공동의 연구 방향을 모색한다. 특히 모든 연구는 실제 산업에서의 적용 가능성을 고려해 설계되기에 기업들과도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성과 평가와 보상 역시 협업에 기반한다. 정용빈 엔지니어는 “함께 협업한 연구자, 엔지니어, 매니저들과의 상호 평가가 연 2회 진행되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보상이 정해진다”고 전했다.
재택과 사무실 근무를 유연하게 조율할 수 있는 문화도 있다. 아이 하원 시간에 맞춰 퇴근하고, 이후 남은 업무를 집에서 마쳐도 눈치를 주지 않는 게 한국과의 차이점으로 꼽혔다. 구성원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집중하며, 잔업이나 초과 근무를 당연시하는 분위기는 없다.
황수빈 KU 루벤대 박사과정 연구원은 “한국 기업 문화를 반영하듯 다른 국가 연구원들은 한국인을 '하드워커'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하지만 아이멕은 다른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아이멕을 그대로 복제하기보다는, 한국 산업 구조에 맞는 '하이브리드형 R&D 모델'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보유한 고가의 인프라를 활용하되 이들의 이익이 아닌 고위험·장기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성연 아이멕 연구원은 “아이멕은 특정 기업의 수익을 위한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파트너가 참여하고, 연구 중심적인 운영이 가능하다”며 “세계 최고 수준의 국내 인프라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다양한 국내외 연구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KU 루벤대에서 박사과정 중인 이인환 SK하이닉스 TL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등 고가의 장비를 연구자들이 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기업이 필요하는 실무형 인재 양성이 가능하다”며 “또 단기 성과보다 한 단계 깊이 있는 기초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진형 기자 j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