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력기기 국제공인 시험인증 기관으로 자리매김한 한국전기연구원(KERI·원장 김남균)이 전기차 충전 분야에서 또 한 번 '세계 최초' 이정표를 세운다.
KERI는 오는 25일 안산분원에 세계 첫 전기차 충전 '글로벌 상호운용성 시험센터(GiOTEC, Global interOperability Testing Center)'를 개소한다.
'상호운용성'이란 전기차와 충전기 간 호환성을 의미한다. 글로벌 호환성은 전기차와 충전기를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하드웨어(장치)는 물론, 눈에 보이진 않지만 국제 표준으로 정의한 소프트웨어(충전 절차와 통신 프로토콜)를 모두 준수할 때 인정된다. 어떤 전기차든 충전소나 충전기 제조사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 편리하고 안전하게 충전하려면 이를 갖춰야 한다.
최근 전기차 주행거리는 길어지고 고속충전 기술도 범용화하는 추세다. 동시에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을 불러온 화재사고 등에 대한 우려를 불식해야 하는 과제도 만만치 않다. 전기차 충전 편의성과 안전성은 가속페달과 브레이크처럼 상대적 개념이면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전기차와 충전기 간 오류가 빈번하다. 전기차 종류는 다양해지고 다수 충전기 제조기업이 시장에 뛰어들면서 제조사별 표준 해석에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기차 시장 확대에 걸림돌 중 하나다.

◇전기차 충전 상호운용성 빠르게 검증
GiOTEC은 상호운용성 문제를 빠른 시험검증으로 해결하고, 기업 성장 애로를 해소하고자 만든 지원 인프라다.
KERI는 그동안 전기차와 충전기를 교차 검증하는 국제 테스티벌(Test+Festival)을 매년 개최하며 상호운용성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벤트성이었던 만큼 제조사의 검증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업이 원할 때마다 상호운용성을 테스트해 개선 방안을 도출할 수 있는 상시 시험 인프라 구축이 필요했다. KERI가 GiOTEC을 구축한 이유다.
GiOTEC은 전기차와 충전기 호환성을 시험 검증하는 인프라다. 전기차·충전기 제조사는 물론 충전서비스사업자 등 생태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상호운용성 확보를 목표로 한다. 이 구심점을 KERI가 주도해 국내에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는 더욱 크다.
현대차·기아, 벤츠코리아, BMW코리아, KG모빌리티 등 완성차 기업과 국내 충전기 제조사가 지난해부터 시험장 구축, 시험 및 검증 기준 확립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며 GiOTEC에 합류했다. 합류 기업은 일정한 기준을 통과하면 GiOTEC 회원사로서 자사 전기차와 충전기를 추가 비용 없이 6개월에서 최장 1년까지 시험장에 상시 배치하고 테스트할 수 있다.
참여 기업 리스트와 테스트 활동은 투명하게 공개한다. 제조사 동의를 기반으로 시험 결과물과 호환성 해결 방안 등은 다른 회원사와 공유한다. 데이터가 쌓이면 제품 품질을 개선할 수 있고, 이는 국제 표준을 선도하는 기반이 된다.

◇풍부한 시험·인증 경험 바탕 국제표준 주도
KERI는 2016년부터 전기에너지 네트워크가 모빌리티로 전환 확산할 것으로 내다보고 전기차와 충전 시스템에 주목했다. 테슬라를 위시해 전 세계적으로 전기차 시장이 본격 성장하기 시작한 시기다.
KERI는 국제공인 전력기기 시험인증 기관 노하우를 토대로 이후 2년 만인 2018년 아시아 최초로 '차린(CharIN)' 기술분과 팀 리더를 배출해 전기차 충전 분야 경쟁력을 입증했다.
GiOTEC 초대 센터장을 맡은 서우현 KERI 전기에너지평가본부 지능형에너지시험실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서 실장은 현재까지 차린의 글로벌 전기차 시험인증 프로그램 구축과 운영에 핵심 역할을 하는 '적합성 시험 및 상호운용성' 기술분과 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린은 배터리로 구동하는 모든 종류의 전기차 충전시스템의 국제 표준 개발을 촉진하고 이에 적합한 시험인증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국제 전기차 충전 협의체다.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KERI는 지난 2021년 차린으로부터 역량을 인정받아 독일 인증기업 데크라와 함께 세계 첫 전기차 글로벌 상호운용 적합성 평가기관으로 지정됐다. 다수 전기차와 충전기를 한 번에 시험할 수 있는 전기·전력 인프라 보유, 전기차 충전 시스템과 시험인증 프로그램 구축, 국제 표준 개발에 기여할 수 있는 전문가 보유, 다양한 시험인증 경험과 국제무대 활동 경력 등이 반영된 결과다.

KERI는 2022년, 2024년에는 차린과 협력해 안산분원에서 아시아 유일의 '차린 전기차 테스티벌'을 주최했다. 전기차와 충전기 시장을 선도하는 제조사 관계자 300여명이 한 자리에 모여 기술적 고민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국제 콘퍼런스도 주관했다.
2024년 콘퍼런스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에너지위원회(CEC) 모빌리티 분야 패티 모나한 위원장이 직접 참석해 이목을 끌었다. CEC는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정부 측 리더로 전기차 관련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이다. 모나한 위원장은 당시 KERI의 GiOTEC 구축 계획에 큰 관심을 보였다.
CEC도 GiOTEC 같은 콘셉트의 상호운용성 시험 사이트 구축을 목표로 '차지 야드(Charge Yard)'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최근 공모 결과,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있는 비영리 기관 '캘 에픽(Cal EPIC)'과 차린, KERI가 참여한 컨소시엄이 최종 선정됐다. CEC는 2026년을 목표로 상호운용성 시험사이트를 구축한다.
KERI는 컨소시엄 내에서 유일하게 적합성 및 상호운용성 평가 기술을 보유한 기관이다. 이에 차지 야드 운영 방안이나 기술 기준 수립에 GiOTEC 기술 및 운영 노하우를 연계해 GiOTEC 글로벌 상호운용성을 확보하고 위상도 높여 갈 계획이다.

GiOTEC 회원사 및 국내 제조사들이 글로벌 수준의 상호운용성 역량을 확보하고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차지 야드와 협력도 강화한다.
◇신뢰 바탕 전기차 시장 활성화 일등공신
전기차 시장 성장과 충전 기술 발전으로 전기차-충전기 상호운용성 확보는 전기차 시장을 선도할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이미 전기차 내 인증서로 충전 과금을 결제(PnC)하고, 전기차 전력을 스마트그리드와 연계하는 양방향 충전 기술(V2G)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와 함께 기술적 복잡도가 증가할수록 충전 오류 발생 가능성도 커졌다.
KERI는 GiOTEC에 상시 배치할 전기차와 충전기가 글로벌 최상위 수준의 상호운용성 검증의 기준점이 되도록 만드는 '베스트 프랙티스' 전략을 수립했다. 제3자 관점에서 시험 결과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고, 기업 신뢰를 바탕으로 글로벌 전기차 상용 시대를 선도하는 핵심 기관으로 도약한다.
중장기 전기 충전 신기술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구현하려는 전기차·충전기 제조사를 유치해 평가 수행 후 집중 배치하는 전략도 추진한다. 기업뿐 아니라 정부, 충전 인프라 운영 사업자(CPO)까지 두루 참여하는 전기차 충전 관련 신기술 적용 테스트베드로 자리매김한다는 목표다.
KERI는 올해 말까지 PnC와 스마트 충전제어 기술을 포함한 ISO 15118-2 기반 검증 프로세스를 확립하고, 신규 분야에서는 차린의 적합성 평가기관 추가 지정을 받을 계획이다.
내년에는 참여기업 진용 확대에 박차를 가한다. 현재 약 20개 참여사를 2028년까지 40개로 확대할 계획이다. CEC 차지 야드를 비롯한 글로벌 협력 확대로 GiOTEC이 국제 상호운용성 센터로 입지를 다지면 관련 생태계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가 늘 것으로 기대한다.

김남균 KERI 원장은 “전기차와 충전기는 단일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만큼 상호 호환이 필수다. 향후 충전 신기술 도입까지 고려하면 관련 표준을 확보한 국가나 기업이 전기차 시장 주도권을 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GiOTEC은 빠르고 정확한 시험과 인증서를 제공해 우리나라 기업의 제품과 수출 경쟁력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동균 기자 defros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