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박상봉 시인의 네번째 시집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 출간…언어와 묵음의 경계 선상에서 춤추는 시어

언어와 묵음의 경계에서 시어를 길어 올려온 박상봉 시인이 네 번째 시집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를 펴냈다. 이번 시집은 '청음의 시학'과 '침묵의 미학'을 중심으로, 들리지 않는 세계와 말 이전의 감각을 언어로 사유한 시편 51편을 묶었다.

박상봉 시인은 삶이 언제나 '불 꺼진 단어 곁'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말하지 않아도 삶은 살아지고, 소리 나지 않아도 서로는 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 그의 시의 출발점이다. 이번 시집은 그 믿음을 언어로 세계화하려는 시인의 성실한 사유의 결과물이다. 그는 언어와 침묵 사이에서 서성거리며, 때로는 춤추듯 손짓하며 세계와의 소통 가능성을 탐색한다.

박상봉 시인의 네번째 시집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 앞표지
박상봉 시인의 네번째 시집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 앞표지

이번 시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정조는 '소리의 머뭇거림과 두근거림'이다. 시인은 청력 상실이라는 개인적 체험을 시의 핵심 동력으로 삼아, 들리지 않는 것의 파장과 존재 사이의 미세한 떨림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표제작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와 '청음' 등에서는 소리가 아닌 소리, 말 이전의 울림이 시인의 느린 호흡으로 잔잔하게 흐른다.

박상봉의 시에서 소리는 단순한 청각적 현상이 아니라, 대상과의 완전한 통함을 향한 열망이다. 그가 추구하는 소리의 미학은 곧 침묵의 시학이며, 말하려는 의지와 들으려는 태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시는 태어난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실제와 언어 사이의 간극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사유하려는 시인의 윤리적 선택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에는 연애 감정의 파문이 깊게 스며 있다. 사물이든 풍경이든, 결국은 인간의 모습으로 귀결되는 시선은 그리움과 연민을 품고 있다. “사랑은 꼭 말로 해야 하나?”라는 반문이 시 곳곳에서 울리지만, 동시에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인간 조건에 대한 자각도 함께 놓여 있다.

박상봉 시인
박상봉 시인

박상봉 시인은 1981년 박기영·안도현·장정일 시인 등과 함께 동인지 '국시'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85년부터는 대구 봉산동에서 북카페 겸 문화공간 '시인다방'을 운영하며 젊은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고, 이후 '산아래서 詩누리기', '시인과 독자의 만남' 등 200회가 넘는 문학 프로그램을 기획·진행하며 지역 문학과 문화운동에 꾸준히 기여해왔다.

2007년 마흔아홉의 나이에 첫 시집을 펴낸 그는 2021년 두 번째 시집 '불탄 나무의 속삭임'을, 2023년 세 번째 시집 '물속에 두고 온 귀'를 통해 자신만의 시세계를 본격적으로 구축했다. 특히 '물속에 두고 온 귀'로 제34회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시집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는 그 변화의 연장선에서, 더욱 응축된 언어와 사유로 완성도를 높였다.

시집 발문을 쓴 이하석 시인은 “박상봉의 시는 소통을 꿈꾸는 연애 감정의 파문이며, 서로 한 풍경 속에서 일체화를 이루려는 시적 구조”라고 평했다. 엄원태 시인 역시 “낮은 음역이지만 그윽하고 힘 있는 시로, 생을 관통하는 본성적인 삶의 원리에 도달한다”고 평가했다.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는 소통과 일체화를 향한 간절함으로 쌓아올린 사랑의 탑과도 같은 시집이다. 말과 침묵, 소리와 묵음 사이에서 끝내 '통함'을 포기하지 않는 한 시인의 고집스러운 질문이 독자 앞에 조용히 놓인다.

정재훈 기자 jho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