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의 어느 날, 호남권 소재 대학을 졸업한 김영수(31)씨는 자율주행 출근 셔틀버스에 오른다. 그의 목적지는 전남·광주 통합특별시에 조성된 미래차 소재·부품·장비 특화단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선배들은 졸업과 동시에 수도권으로 향하는 '상경 열차'에 몸을 실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김씨는 대학 시절 정부 지원을 받아 호남권 반도체 인력양성 교육을 이수한 뒤, 자율주행차용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지역 기업에서 인턴십을 경험했다. 이 기업이 지역 내 특화단지에 위치해 있어 출퇴근이 가능한 것이 큰 장점이었다. 덕분에 취업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는 최근 결혼을 앞두고 인근 혁신도시에 신혼집을 마련하며 정착을 준비하고 있다.
이 장면은 아직 가상의 이야기다. 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현실이 되어야 할 지역의 미래이기도 하다. 지역 경제를 이끄는 혁신 기업들이 지역에 자리잡아 인재를 끌어들이고,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도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 국토를 넓게 쓰자는 발상에서 출발한 '5극 3특'(전국 5대 초광역권 및 3대 특별자치도) 기반 지역균형발전 전략의 지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국토 12%에 연구자원 73% 집중…냉혹한 현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냉혹하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연구개발활동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가 전체 연구개발비의 73%에 해당하는 95조6961억원이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반면 대전을 제외한 13개 시·도의 연구개발비는 전체의 18.8%(24조5794억원)에 그친다. 수도권의 연구개발비 비중은 2020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반면, 비수도권은 오히려 비중이 줄어드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자금에 그치지 않는다. 인재 역시 수도권으로 쏠리고 있다. 같은 조사에서 전체 연구원 61만5063명 가운데 41만5630명이 수도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의 67.6%다. 특히 전년 대비 수도권 연구원 수는 2.8%(1만1492명) 증가한 반면, 비수도권은 0.3%(419명) 증가에 그쳐 사실상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다.
연구개발(R&D) 투자는 단순한 기술 개발 행위를 넘어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는 출발점이다. 예산이 투입되는 곳에는 기업과 연구소 등 첨단 산업 인프라가 구축되고, 양질의 일자리와 우수 인재가 모여든다. 다시 말해 R&D 투자는 해당 지역을 혁신 거점으로 만드는 핵심 동력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국토의 12%에 불과한 수도권에 연구 자원과 인적 자원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구조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구조가 지속된다면, 국가 전체가 성장하더라도 앵커 기업이 부재한 지역에는 성장의 온기가 충분히 확산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5극3특 전략, 선택 아닌 시대적 과제
이재명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2026년을 대한민국 대도약의 원년으로 만들겠다”며 “국가의 성장이 모든 국민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나라”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전략이 바로 '5극 3특'에 기반한 지역주도성장이다. 기존 17개 시·도 체계는 향후 5대 초광역권과 3대 특별자치도 등 8개 권역으로 재편된다. 이에 따라 지방정부의 권한과 역할은 확대되고, 산업·기술·인재가 권역 단위로 재배치된다. 교육·의료·교통·문화 등 핵심 인프라도 권역 내 자족성을 기준으로 구축될 예정이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정부가 제시한 균형성장 원칙인 '중앙에서 멀수록 더 두텁게'다. 이는 자원을 단순히 균등하게 나누는 방식에서 벗어나, 지역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고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히려 의도적인 '불균형 배분'이 필요하다는 정책적 전환을 담고 있다.
이러한 기조에 맞춰 산업통상부는 지난 1월 산업 R&D 혁신 방안을 발표했다. 지역 특화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해 지역주도성장을 뒷받침하겠다는 취지다.
우선 기존의 중앙 주도형 R&D 구조를 개편해, 과제 기획부터 예산 배분까지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또한 앞으로의 R&D 사업은 단순한 기술개발을 넘어, 지역 기업 맞춤형 인재 양성과 연구 인프라 확충을 패키지 형태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환된다. 더 나아가 비수도권만 참여할 수 있는 '지역 전용 과제'도 신설할 계획이다.
그동안 산업부의 지역산업 지원사업을 수행해 온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역시 지원 체계를 지역 중심으로 전면 개편할 방침이다. 중견기업 지원 프로그램에는 지역기업 전용 트랙을 신설해 전체 예산의 최소 60% 이상이 지역 기업에 배분되도록 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지방정부에 투자를 약속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전용 R&D 사업도 추진된다.
아울러 '5극 3특' 체계에 기반한 지역·산업별 맞춤형 인재 양성과 확보를 위해 995억원이 투입된다. 향후 지역별 성장 엔진이 확정되면, 지방시대위원회와 중앙·지방정부가 협력해 각 권역의 특성을 반영한 육성 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지역의 성장이 곧 국가의 성장
대한민국 산업이 저성장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한 해답은 결국 지역주도성장에 있다. 특정 지역에 자원을 집중하는 전략은 과거 압축 성장 과정에서는 일정 부분 효과를 거뒀다.
그러나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된 지금의 환경에서는 오히려 구조적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 과밀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국토를 보다 균형 있게 활용해 주력 산업의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는 전략이 절실한 이유다.
앞으로 '5극 3특'이라는 새로운 틀 위에서, 기업의 투자가 지역 산업 생태계를 키우고 다시 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균형 성장을 위해 '적극적 불균형'을 선택한 정책적 시도가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진다면, 앞서 언급한 김영수씨의 이야기는 더 이상 가상이 아닌 일상이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대한민국 산업의 진정한 도약도 완성될 수 있다.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필자〉전문 과학기술인으로 시작해 국회의원, 기관장으로 선임된 인사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치·정책 분야까지 확장했다. 1959년생으로, 이화여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일본 규슈대에서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원자력연구소에서 근무하다 1991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최초의 여성 유치 과학자로 입소했다. 이후 20년간 국내 원자력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과 한국원자력학회장도 역임했다. 2022년 9월부터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