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급시우(及時雨)의 시대를 지나, 핵융합 실증을 향한 기술 이정표

양형렬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혁신핵융합로설계단장
양형렬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혁신핵융합로설계단장

2026년 3월, 정부는 K문샷 12대 국가 미션을 발표했다. 그 핵심 과제 중 하나로 핵융합이 자리한다. '한국형 혁신핵융합로 개발, 2030년대 전력 생산 실증.' 핵융합 연구에 몸담은 이로서, 이 명문화된 목표가 갖는 무게를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다.

반세기 넘게 '궁극의 에너지'라는 수식어를 달고도 먼 미래의 일로만 여겼던 핵융합에, 국가가 비로소 기한을 부여했다. 꿈에 책임을 입힌 것이다. 프로그램 디렉터(PD) 중심의 책임운영 체계, 특별법 제정, 기업 파트너십까지 핵융합이 국정 과제 중심에 이토록 구체적 형태로 놓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환영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경의에 가깝다.

수호지의 송강에게는 급시우(及時雨)라는 별호가 있었다.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가장 절실한 순간에 나타나는 존재를 뜻한다. 오늘날 급변하는 세계 핵융합 지형을 바라볼 때, 이번 K문샷 미션이야말로 우리 연구 현장에 도래한 급시우라고 생각한다.

글로벌 경쟁은 이미 치열하다. 중국은 BEST(Burning Plasma Experimental Superconducting Tokamak) 장치 건설을 진행하며 2027년 첫 플라즈마를 목전에 두고 있다. 미국의 커먼웰스 퓨전시스템즈는 초전도 토카막 장치인 SPARC의 건설 한복판에서 이미 후속 상업로 ARC(Affordable Robust Compact)의 설계를 병행하고 있다.

영국은 STEP(Spherical Tokamak for Energy Production) 실증로의 부지를 확정했고, 일본은 JT-60SA를 가동하며 동시에 FAST(Fusion by Advanced Superconducting Tokamak) 프로그램을 추진한다. 세계가 일제히 실증의 문턱을 향해 달려가는 이 격전의 한복판에, 대한민국이 핵융합의 깃발을 들어 올린 것이다. 이는 글로벌 기술 경쟁 대열에서 한국의 위치를 명확히 하는 적절한 시점의 단비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이제 개념설계의 첫 삽을 뜨려 한다. 요소기술에서는 세계적 성과를 거뒀으나, '핵융합로 단위'의 통합설계 역량 확보는 본 프로젝트 완수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핵심 과제다. 그러나 이것이 뒤처짐의 증거가 아닌 도약의 출발선으로 봐야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중국의 BEST도 미국의 SPARC 같은 선두 주자들 역시 2027년 '최초 플라즈마' 점화를 목표로 여전히 건설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아직 지구상에 상업적 전력을 생산한 핵융합로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지금은 경쟁의 축이 '개별 기술 검증'에서 '실증로 설계 및 건설'로 급격히 옮겨가는 패러다임의 변곡점이며, 우리는 후발 주자가 아닌 '동시 경쟁자'로서 이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승부를 걸 만한 강력한 패가 있다.

세계 최장 고성능 플라즈마 운전 기록을 보유한 KSTAR의 데이터, ITER 핵심 조달품 제작을 통해 축적한 엔지니어링 역량,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역량과 이를 뒷받침하는 견고한 공급망,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설계·건설 기간의 획기적 단축이라는 비대칭 전략이다.

시간을 압축할 수 있는 무기가 우리 손에 있다. 핵융합에너지 핵심기술 실증센터 사업과의 연계, 디지털 가상 핵융합로 플랫폼의 활용이 맞물린다면, 2030년대까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경로는 분명히 존재한다.

K문샷이 핵융합계에 건넨 것은 그 필요성의 국가적 인식만이 아니다. 신뢰다. 50년간 '앞으로 30년'이라는 세간의 조소를 감내하면서도 연구의 불씨를 지켜온 이 공동체에, 국가가 같은 시계를 맞추어 주었다. 급시우의 단비를 받은 이상, 이제 그 신뢰에 사명을 걸고 응답해야 할 차례는 우리에게 있다. 성과 없는 낙관의 반복이 아닌, 마일스톤마다 증명으로 답하는 실증적 전진이어야 한다.

물리와 공학을 분리해 온 오랜 관행을 넘어 '핵융합로' 통합설계 역량을 갖추어야 하며, AI를 수사가 아닌 실질적 설계 도구로 체화해야 한다. 시의를 얻은 이 단비가 마른 땅에 스며들 듯, 우리는 이 기회를 한 방울도 허투루 흘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핵융합 실증의 길을 열어 나가야 할 것이다.

양형렬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혁신핵융합로설계단장 hlyang@kfe.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