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흩어진 IT 전시회, 이제는 하나로 묶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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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보기술(IT)·스타트업 전시회는 양적으로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봄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최의 월드IT쇼(WIS)가 열리고, 초여름에는 산업통상부 후원의 넥스트라이즈(NextRise)가 이어진다. 가을에는 서울시의 트라이 에브리싱(Try Everything), 연말에는 중소벤처기업부 주도의 컴업(COMEUP)이 글로벌 스타트업 축제를 표방하며 무대를 꾸민다. 여기에 정보보호 분야의 ISEC, 핀테크 분야의 코리아 핀테크 위크 등 특화 행사까지 더하면 연간 주요 IT 관련 전시·행사만 10여개를 훌쩍 넘는다.

◇행사는 넘치지만 대표할 무대는 없다

각각의 전시회는 나름의 역사와 성과, 운영 논리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많은 행사들이 과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하나의 강력한 글로벌 플랫폼으로 이어지고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는 쉽게 긍정하기 어렵다. 현장에서 만나는 기업군과 주제는 행사마다 상당 부분 겹친다. 인공지능(AI), 디지털 헬스, 모빌리티, 서비스형소프트웨어(SaaS), 로봇, 스마트시티,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같은 키워드는 거의 모든 전시회에서 반복된다. 각기 100~500여개 기업이 참가하지만, 유사한 주제가 연중 분산 반복되다 보니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기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수치로 보면 그 분산의 문제가 더 선명해진다. 2024년 기준 월드IT쇼의 해외 참관객 비율은 전체의 10% 안팎에 그쳤다. 반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MWC는 매년 200여 개국에서 10만명 이상이 몰리고, 그중 90% 이상이 외국인이다. 규모의 차이만이 아니다. 참가 기업 입장에서도 현 구조는 비효율적이다. IT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비용의 문제뿐만 아니라 시간의 문제 등 비효율적인 부분이 많다. 비슷한 무대에 여러 차례 나뉘어 서는 동안, 정작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을 각인시킬 기회는 희석된다. 힘은 있는데, 그 힘이 분산된 셈이다.

◇도쿄는 왜 스시테크를 키웠나

이 대목에서 일본 도쿄의 스시테크(SusHi Tech Tokyo)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시테크는 단순한 전시회가 아니다. 도시 문제 해결, 스타트업, 대기업, 투자자, 공공 부문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낸다. 전시와 콘퍼런스, 피칭, 비즈니스 매칭, 오픈이노베이션,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다. 해외에서 볼 때 스시테크는 개별 행사의 집합이 아니라, 일본이 보여주고 싶은 미래 산업 전략의 압축판처럼 읽힌다.

스시테크가 완성형 행사라는 뜻은 아니다. 일본 특유의 의전 중심 형식성이 여전해 스타트업 행사에서 기대되는 속도감과 실험 정신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럼에도 주목할 점은 분명하다. AI 시대를 맞아 일본이 스타트업을 국가와 도시 경쟁력의 핵심 축으로 재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시테크 도쿄 2025 실적 - 도쿄도가 주최하는 스시테크는 2025년 방문자 5만7000여명, 참여 스타트업 607개사를 기록했다. 특히 비즈니스 상담은 전년 대비 76% 증가한 6136건에 달했고, 해외 벤처캐피털 506곳이 참가해 명실상부한 글로벌 스타트업 플랫폼으로 자리잡았다. (자료: SusHi Tech Tokyo 공식 발표)
스시테크 도쿄 2025 실적 - 도쿄도가 주최하는 스시테크는 2025년 방문자 5만7000여명, 참여 스타트업 607개사를 기록했다. 특히 비즈니스 상담은 전년 대비 76% 증가한 6136건에 달했고, 해외 벤처캐피털 506곳이 참가해 명실상부한 글로벌 스타트업 플랫폼으로 자리잡았다. (자료: SusHi Tech Tokyo 공식 발표)

◇세계적 전시회의 뒷면에는 '통합과 시너지'가 있다.

세계 주요 IT·산업 전시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통합의 문법으로 설계돼 있다. 독일의 IFA 베를린은 독일 가전통신전자협회(GFU)와 글로벌 전시기업 클라리온 이벤츠가 합작법인(JV)을 구성해 운영한다. 브랜드와 콘텐츠 기획은 산업계가, 글로벌 마케팅과 운영 효율은 민간 전문기업이 맡는 구조 덕분에 IFA는 특정 정부의 임기나 정책과 무관하게 수십년간 일관된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스페인 MWC 바르셀로나는 더 정교한 모델이다. GSMA가 콘텐츠를 기획하고, 피라 바르셀로나와 바르셀로나시, 카탈루냐 주정부, 스페인 중앙정부가 10년 단위 장기 협약으로 묶여 있다. 매년 행사 기간 동안 바르셀로나 경제에 유입되는 직접 경제효과만 5억유로(약 7500억원)를 넘는다. 독일 하노버 메세 역시 도이치 메세 AG가 주최를 맡고 기계협회(VDMA), 전자협회(ZVEI) 등 산업협회들이 핵심 파트너로 참여하는 구조로, 정부는 외교적 지원과 홍보 역할로 뒤로 물러선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이들은 모두 정부가 주최권을 직접 쥐지 않는다. 산업계, 협회, 민간 전시기업, 지방 정부가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고, 단년도 예산이 아닌 장기 협약과 안정적 재원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한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부처가 주최권을 쥐고 매년 단년도 예산으로 운영되는 구조에 머물러 있다.

해외 통합 전시 대표 사례 (출처: 각 전시회 공식 보도자료, 2025년 기준)
해외 통합 전시 대표 사례 (출처: 각 전시회 공식 보도자료, 2025년 기준)

◇한국도 하나의 무대를 세워야 한다

한국은 충분한 역량을 갖고도 그 역량을 하나의 상징적 플랫폼으로 모으는 데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월드IT쇼, 넥스트라이즈, 트라이 에브리싱, 컴업 각각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기능이 나뉘어 있다고 해서 국제무대에서도 반드시 따로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는 결국 하나의 국가 브랜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각 부처가 분산해 집행하는 예산과 운영을 통합해 하나의 대표적인 글로벌 IT 전시회를 만든다면 어떨까. 핵심은 단순히 규모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해외 바이어와 투자자, 미디어가 '한국에 가려면 이 행사 하나만은 반드시 봐야 한다'고 인식하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통합의 로드맵: 3단계로 접근해야 한다

통합은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방향을 정하고 단계적으로 나아간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1단계는 '연계와 브랜딩'이다. 당장 행사를 통폐합하기 어렵다면, 기존 4개 주요 전시회를 하나의 '코리아 테크 위크(Korea Tech Week)' 브랜드 아래 묶는 방식을 검토할 수 있다. 각 행사의 주최권과 운영 구조는 유지하되, 해외 홍보와 바이어·투자자 초청을 통합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해외에서 한국 IT 생태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질 수 있다.

2단계는 '컨트롤 타워 구축'이다. 부처 간 조정을 위한 상설 협의체가 필요하다. 현재는 각 부처가 독립적으로 행사를 기획하고 예산을 집행하다 보니 일정 충돌과 중복 참가 기업 문제가 반복된다. 국무조정실 또는 대통령실 직속의 'IT 전시 통합 협의회' 같은 기구가 아젠다 설정과 예산 배분, 성과 지표 관리를 맡는다면 단기적인 효율화도 가능하다.

3단계는 '독립적 거버넌스 전환'이다. 중장기적으로는 IFA나 MWC처럼 정부 주도에서 벗어나,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KAIT)·벤처기업협회·코트라(KOTRA) 등이 공동 출자해 전담 운영법인을 설립하고 정부는 재정 지원과 외교적 후원으로 물러서는 구조가 바람직하다. 그래야 행사의 정체성이 정권 교체나 장관 교체와 무관하게 유지되고, 10년·20년을 내다보는 글로벌 브랜드가 탄생한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

반도체와 배터리, AI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력은 세계 수위권이다. 그런데 그 기술력을 세계에 한 번에 각인시킬 무대가 없다는 것은 분명한 전략적 공백이다. 지금 한국에는 삼성이 세계 최고 반도체 회사라는 사실은 다 알아도, 한국 IT 생태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무대를 떠올리는 사람은 드물다.

부처마다 정책 목적이 다르고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미룰 수 없다. 전시회는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국가의 산업 전략과 브랜드 경쟁력이 응축되는 현장이다. 정부가 조정 역할을 자임한다면, 한국의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전 세계에 알릴 진정한 글로벌 IT 전시회가 탄생할 수 있다. 비슷한 행사를 흩어놓은 채 각자의 성과에 안주할 때가 아니다. 전 세계를 누비며 분산된 무대에서 힘을 쪼개야 했던 수많은 기업인들도, 스타트업 창업자들도, 한국을 대표하는 단 하나의 강렬한 장면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현우 서울경제진흥원 대표.
김현우 서울경제진흥원 대표.

김현우 서울경제진흥원 대표 hwood@sba.soul.kr

〈필자〉 1991년 한국장기신용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외국계 은행 HSBC를 거쳐, IT 창업 붐 속에서 벤처캐피털 보스톤창업투자를 설립해 대표로 활동했다. 2000년대 중반 셀트리온에 투자해 주목받았으며, 영화 '괴물' '해운대' 등 200편 이상의 콘텐츠 투자로 영역을 넓혔고, 2017년 아시아경제TV 대표로 취임해 블록체인·비트코인 시황을 경제매체 최초로 방송했다. 2021년 11월 서울경제진흥원 대표로 부임해 서울콘, CES, 미래혁신단·뷰티본부 신설 등 공공 혁신을 이끌고 있다. 2007년 대통령 표창, 2024년 산업포장, 2025년 국가브랜드대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