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신의 핀테크스토리]AI가 지갑을 여는 시대, 에이전틱 커머스의 개막

'부산 출장에 맞춰 서울 출발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하되, 총비용은 50만 원 이내로 하고 이동시간이 가장 짧은 조합을 찾아줘.' 이 한 문장을 남기면 잠시 후 항공권과 호텔 예약이 완료됐다는 메시지가 도착한다. 이용자가 사이트를 방문해 상품을 비교하거나 결제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인공지능(AI)이 검색부터 선택·예약·결제까지 모두 처리한 것이다. 바야흐로 AI가 스스로 판단해 외부 시스템에서 결제까지 완료하는 '에이전틱 커머스' 시대의 개막이다.

조사기관마다 차이가 있지만, 시장의 성장세는 뚜렷하다. 모도르 인텔리전스에 의하면 유통·전자상거래 분야의 에이전틱 AI 시장은 2025년 467.4억 달러에서 2026년 604.3억 달러로 약 29% 증가하고, 5년 후인 2031년엔 2184억 달러로 3.6배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급성장할 것으로 보는 이유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정보 홍수로 인한 소비자의 과도한 선택 피로와 탐색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컨설팅업체 액센츄어에 의하면 2024년 전 세계 소비자 조사 결과, 응답자의 74%가 과도한 정보와 선택지에 압도되어, 직전 3개월간 구매를 중단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둘째, 거대 언어모델(LLM)과 API 기술의 발달로 AI 에이전트가 스스로 검색·선택·예약·결제 전체를 처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기존 챗봇과 달리, 최근 AI 에이전트는 외부 API 연동, 멀티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기술 등을 활용해, 복잡한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 셋째, 기업의 발주·정산 비용 절감 수요도 한몫했다는 평가다. 맥킨지는 조달 운영체계와 기술을 AI 에이전트 중심으로 전환하면 조달 기능의 효율성을 25~40% 높일 잠재력이 있다고 분석한다. 실제 고객사 적용 사례에서도 AI 카테고리 에이전트가 반복적이고 부가가치가 낮은 업무를 자동화해 조달팀의 효율성을 15~30% 개선한 것으로 나타났다.

누가 주도하고 있나. 우선 빅테크 쪽에선 구글이 2025년 9월 페이팔, 아메리칸익스프레스 등과 함께 에이전트 결제 프로토콜(AP2)을 발표했고, 2주 후에 오픈AI도 에이전틱 커머스 프로토콜(ACP)을 통해, 소비자가 챗GPT 안에서 몇 번의 탭만으로 결제까지 끝낼 수 있는 인스턴트 체크아웃시스템을 선보인 바 있다. 결제 인프라에서도 표준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다. 마스터카드가 2025년 4월 AI 에이전트 결제 솔루션인 에이전트 페이를 시장에 내놓자, 비자는 2025년 10월 AI 에이전트와 악성 봇을 명확히 구분하는 솔루션으로 맞불을 놓았다.

이에 대해 세계 최대 온라인 유통회사인 아마존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아마존은 타업체와 협력하기보다 2024년 2월 출시한 생성형 AI 쇼핑 도우미 루퍼스와 에이전틱 쇼핑 모델 바이 포 미 기능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수십 년간 축적한 막대한 데이터와 물류 인프라를 무기로 독자적인 에이전틱 커머스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러한 에이전틱 커머스의 확대는 유통·금융시장의 패러다임 전환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첫째, 상품 탐색과 구매 의사결정의 주체가 인간에서 AI로 이동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 유통시장이 인간을 자극하는 시각 디자인과 감성 마케팅에 의존했다면, 앞으론 AI가 판독하는 데이터의 양과 정교함이 중요하다. 가격, 배송, 재고 정보 등이 얼마나 기계 친화적으로 짜여 있느냐가 유통회사의 핵심 경쟁력이 될 거란 얘기다.

둘째, 금융 결제 보안의 중심 축이 신원 인증에서 권한 검증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AI 에이전트가 인간을 대신함에 따라, 기존의 카드번호나 비밀번호 입력 방식만으론 AI 에이전트 거래를 안전하게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해당 AI가 사용자의 승인을 받은 진짜 에이전트인지, 또 결제금액이 예산 한도 내 금액인지 등을 실시간 검증하는 금융 보안 기술이 급부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외에 금융상품이 초개인화 금융 솔루션으로 전환된다든지, 기업의 자동 발주·정산 시스템 구축으로 금융·유통의 거래 비용 절감과 생산성 향상 효과도 기대되고 있다.

물론 제약점과 과제도 적지 않다. 정보 오류나 조작된 후기로 인해 AI가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플랫폼이 광고비나 수수료 수입을 이유로 알고리즘을 왜곡할 경우, 소비자 이익이 침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임 소재도 문제다. AI의 오작동이나 보안 사고로 잘못된 결제가 일어났을 때 이용자, AI 사업자, 금융사, 판매자 중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아직 명확한 기준이 없다. 따라서 초기 단계에선 AI 에이전트에 대한 포괄적 권한 위임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또 소액·반복 거래는 자동으로 처리하되, 고액이나 비정상 거래는 사람이 최종 승인하는 방식과, 의사결정과정을 사후 검증할 수 있는 감사 추적 기록을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우리나라는 뛰어난 간편결제와 오픈뱅킹 시스템이 구축돼 있어, 에이전틱 커머스의 적용 환경은 유리하다는 평가다. 실제로 2026년 3월 신한카드는 마스터카드와 협력해 AI 에이전트가 모빌리티 서비스의 검색·예약·결제를 수행하고, 이용자가 한 차례 승인하는 국내 카드업계 최초의 인증형 에이전틱 커머스 실거래에 성공했다. 4월엔 다날이 글로벌 협의체 에이전틱 AI 재단(AAIF)에 국내 기업 최초로 합류했고, 네이버도 네이버플러스 스토어의 쇼핑 AI 에이전트를 선보이며, 검색 중심의 쇼핑 경험을 대화형 탐색 방식으로 전환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모범 사례들이 시사하듯, 소비자가 안심하고 구매 권한을 맡기려면 보다 정교한 제도적·기술적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선 금융사와 핀테크 기업은 AI 에이전트 전용 인증 체계와 위임 통제 API의 표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동시에 정책 당국은 에이전트의 신원 확인부터 권한 위임,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법적·정책적 가이드라인을 세워야 한다. 에이전틱 커머스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은 AI의 단순한 연산 속도가 아니라, 그 지갑이 누구의 의도에 따라 어디까지 열릴 수 있는지를 안전하게 통제하는 '신뢰 인프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 겸 AI디지털경제금융포럼 의장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 겸 AI디지털경제금융포럼 의장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 겸 AI디지털경제금융포럼 의장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 겸 AI디지털경제금융포럼 의장 정유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