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비자 행동 연구 분야 권위지 '저널 오브 컨슈머 리서치'에 발표된 최신 연구 결과는 인공지능 전환(AX) 시대를 정면으로 마주한 마케터에게 매우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진다. 연구는 소셜 미디어를 비롯한 디지털 콘텐츠에 '인공지능(AI)으로 생성된 콘텐츠(Made with AI)'라는 라벨이 부착되는 순간, 소비자가 브랜드나 크리에이터에게 느끼는 정서적 유대감이 크게 감소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소비자 심리학의 주요 메커니즘인 '지각된 노력(Perceived Effort)' 이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타인의 결과물을 평가할 때 단순히 최종 산출물의 물리적 품질만을 따지지 않는다. 그 이면에 투입된 인간의 시간과 인지적 에너지, 감정적 수고의 총량까지 무의식적으로 추정하고 평가한다.
지각된 노력은 소비자가 상대방에게 정서적 부채감과 신뢰를 느끼게 하고, 더 나아가 일방적인 애착 관계인 '의사사회적 관계(Parasocial Connection)'를 형성하게 하는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그러나 콘텐츠에 표시된 AI 자동화라는 표식은 소비자가 인식하는 인간적 노력의 가치를 약화시킨다. 그 결과 아무리 완성도가 높은 결과물이라도 '손쉽게 만들어낸 낮은 가치의 산출물'로 인식될 수 있으며, 이는 브랜드와 고객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감정적 연결고리를 약화시키는 부작용으로 이어진다. 결국 효율성만을 극대화한 AI 콘텐츠는 초기의 신기함이 사라진 이후 브랜드 로열티와 실제 구매 전환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AI 생성 라벨이 불러오는 이러한 정서적 불이익과 단절은 최근 미국 테크 업계에서 철학과 심리학 등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생성형 AI와 AI 에이전트 기술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누구나 코딩을 하고 데이터 분석 리포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이에 따라 하드 스킬의 희소성은 빠르게 낮아지는 반면, 문제를 정의하고 맥락을 간파하는 소프트 스킬의 가치는 높아지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들이 AI 윤리 전문가와 행동 심리학자들을 경쟁적으로 영입하는 이유는 AI 성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기계가 인간 언어와 사고 구조를 정교하게 모방하는 시대일수록 인간 중심의 페르소나와 가치관을 설계하는 능력이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인간의 본질과 그 안에 내재된 복잡하고 모순적인 심리적 메커니즘을 깊이 이해하는 인문학적 사유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욱 커지고 있다.
끝없이 작동하는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파편화된 정보와 숏폼 피드에 피로감을 느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 특히 Z세대의 최근 소비 행보는 이러한 인문학적 회귀와 진정성에 대한 갈망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글로벌 영화 플랫폼 판당고의 최신 시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초개인화 기술에 가장 친숙한 세대인 Z세대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어둠 속에서 타인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극장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이 극장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영화를 관람하기 위한 기능적 목적을 넘어선다. 알고리즘이 무차별적으로 노출하는 가짜 정보와 오염된 피드에서 벗어나 선별된 양질의 콘텐츠를 경험하고, 물리적 현존감을 바탕으로 타인과 동시적 경험을 나누기 위해서다. 오프라인의 아날로그 공간에서 느끼는 몰입감과 사회적 리추얼은 알고리즘 피드로 파편화된 디지털 일상에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정서적 결핍을 메우는 창구가 되고 있다.
결국 기업과 마케터들이 AX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구축해야 할 새로운 고객 경험 전략의 핵심은 기술의 화려함과 효율성만을 과시하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모든 기업이 AI를 활용해 빠르게 콘텐츠를 생산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시대에 효율성은 더 이상 차별적 요소가 될 수 없다. 누구나 누리는 보편적인 기본값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율의 시대에는 기획자와 크리에이터의 시행착오와 집요한 고뇌, 그리고 극장이라는 공간이 제공하는 물리성처럼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비효율성의 가치'가 더욱 희소하고 프리미엄한 자산으로 격상될 수 있다. 따라서 브랜드와 제품의 이면에 숨겨진 지각된 노력과 그에 얽힌 서사를 의도적으로 전면에 배치해 고객과의 감정적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 또한 고객을 무한 스크롤의 알고리즘 피드 속에 방치하는 대신, 스스로 선택하고 직접 체감할 수 있는 밀도 높은 아날로그 터치 포인트를 큐레이션할 수 있어야 한다.
완벽한 효율성이 시장을 지배할수록 소비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브랜드를 사랑하겠다”고 고집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힘은 기술이 흉내낼 수 없는 인간적인 비효율성과 진정성의 영역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상욱 HSAD 디스커버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