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연구진이 바이러스가 수백만년의 진화 과정에서 터득한 '생존 전략'을 찾아냈다. RNA의 수명을 늘리고 단백질 생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데 적용할 수 있어, mRNA 백신과 치료제의 성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김빛내리 기초과학연구원(IBS) RNA 연구단장팀이 척추동물 감염 바이러스 337종을 분석해 RNA의 안정성과 단백질 생성을 높이는 다양한 조절 요소를 발굴하고, 이들의 작동 원리를 규명했다고 14일 밝혔다. 과기정통부 IBS 기초과학연구단 지원 사업과 교육부 BK21 사업 등으로 수행된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셀'에 게재됐다.
바이러스는 아주 작은 유전체로 자신의 유전정보를 효율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숙주 세포의 RNA 조절 시스템을 정교하게 활용하며 진화해 왔다. 특히 단백질 생산에 필요한 메신저리보핵산(mRNA) 말단의 '폴리(A) 꼬리'가 짧아지면 mRNA가 쉽게 분해되는데,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의 RNA 조절 효소를 이용해 꼬리를 보호하는 다양한 전략을 발달시켰다.
연구진은 바이러스가 RNA를 조절하는 전략을 활용해 mRNA 백신과 RNA 치료제의 안정성을 높이기로 했다. 이에 2023년과 지난해 바이러스의 RNA 안정화 요소를 발굴하고, 이를 치료용 mRNA에 적용해 안정성과 단백질 생산을 높일 수 있음을 연구로 규명했다. 이런 안정화 요소들은 RNA의 수명을 늘려주는 TENT4 효소와 결합해 mRNA 꼬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다만 지난 연구는 일부 바이러스와 개별 조절 요소 중심으로 수행돼, 다양한 바이러스가 진화시킨 RNA 조절 전략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번 심화 연구에서는 척추동물 감염 바이러스 297개속(屬), 337종에 달하는 바이러스의 유전체를 약 20만개의 RNA 조각으로 나눠 합성했다. 대량 병렬 분석법을 활용해 바이러스 RNA 조절 요소의 다양성과 작동 기전, 진화적 특징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분석 결과, 기존에 알려졌던 TENT4 조절 효소 활용 전략이 예상보다 훨씬 다양한 바이러스에 폭넓게 존재했다. 연구진은 TENT4를 이용해 RNA의 안정성과 단백질 생성을 높이는 조절 요소 23개를 찾아냈다. 이들은 19개 바이러스 속에 걸쳐 분포했다. 서열과 구조적 특징에 따라서는 최소 6가지 유형으로 구분됐다. 이는 계통적으로 서로 먼 바이러스들이 동일한 숙주 RNA 조절 시스템을 활용하는 유사한 전략을 각각 독립적으로 진화시켜 왔음을 보여준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이번 분석에서는 TENT4를 이용하지 않는 새로운 조절 요소가 다수 발견됐다. 연구진은 이 가운데 강력한 효과를 보인 조절 요소 'Pt1'에 주목했다. Pt1은 기존 TENT4 기반 방식과 달리 폴리(A) 꼬리를 합성하는 효소인 'PAP'를 직접 끌어들여 짧아지는 폴리(A) 꼬리를 다시 연장했다. Pt1이 RNA 꼬리를 지속적으로 보충함으로써 mRNA의 분해를 늦춘 셈이다.

연구진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숙주의 RNA 꼬리 조절 효소를 활용해 RNA 안정성과 단백질 생성을 높이는 바이러스 RNA 조절 요소들을 '테일론'으로 명명했다.
연구진은 Pt1이 실제로 RNA 안정성을 높이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반적인 '선형 mRNA'에 적용하는 실험도 수행했다. 선형 mRNA는 양 끝이 열려 있어 세포 내 분해 효소에 의해 쉽게 파괴되는 한계가 있다.
실험 결과, Pt1을 붙인 선형 mRNA 꼬리(아데닌 염기)가 60개에서 194개까지 늘어나며 세포 내 수명인 반감기가 7.6시간에서 23.1시간으로 약 3배 증가했다. 가장 안정적이라고 알려진 '원형 RNA*' 수준으로 안정성이 크게 향상됐다.

연구진은 이번에 발굴한 Pt1이 선형 mRNA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원형 RNA에 버금가는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상대적으로 제조가 용이한 선형 mRNA의 장점을 살리면서 RNA의 수명과 단백질 생산 능력을 증대해, mRNA 백신과 치료제의 성능을 높이는 새로운 기술의 발판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김빛내리 IBS 연구단장은 “이번 연구로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의 RNA 조절 시스템을 이용하는 정교한 전략을 대규모로 밝혀냈다”면서 “발굴한 조절 요소들은 기존 mRNA 치료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약효 지속성을 대폭 높일 수 있는 강력한 분자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수 과기정통부 연구개발실장은 “첨단 바이오 연구 주도를 위해서는 결국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국가 과학 경쟁력 강화와 인류 공영에 기여할 수 있도록 미지의 원리를 규명하는 기초과학 연구를 꾸준히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송윤섭 기자 sy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