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에선 전통 금융과 탈중앙화금융(DeFi)이 빠르게 융합하고 있다. 그 변화가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 분야가 실물 연계 자산(RWA)이다. 이는 국채·펀드·주식·사모 신용 같은 기존 금융 제도상의 자산을 블록체인에 올리고, 여기에 스마트 계약·24시간 이전·자동 결제·온체인 담보 같은 DeFi 기능을 결합하는 시장이다. 즉 전통금융의 법적 권리·수탁·규제와 DeFi의 기술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금융인 셈이다. 2026년 8월 스테이블코인을 제외한 온체인 RWA의 시장 규모는 약 384억 달러로 최근 5년간 연평균 성장률 약 80%의 급성장세다.
왜 이런 융합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을까. 첫째, DeFi 입장에서 안정적인 수익자산과 담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초기 DeFi는 비트코인·이더리움 등 가격 변동성이 큰 자산에 크게 의존했다. 하지만, 시장이 성장하면서 안정적인 대출·투자 기반이 필요해졌고, 이때 가장 적합한 자산으로 급부상한 게 미국의 단기 국채와 머니마켓펀드(MMF)다. 왜냐하면 변동성이 낮으면서 이자수익이 있고, 토큰화하면 대출이나 파생 거래 담보로 활용할 수 있는 자산인 까닭이다. 미국 국채·국채형 상품이 RWA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이유기도 하다.
둘째, 전통금융 역시 결제·청산·담보 관리의 비효율을 줄이기 위해선 DeFi의 효율화 기술이 필요했다. 기존 금융거래는 여러 기관과 시스템을 거쳐야 하지만, DeFi의 스마트 계약을 활용하면 자산과 대금을 동시에 결제하고 담보 이전과 자금관리도 자동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전통금융이 DeFi에 주목하는 이유는 탈중앙화 자체보다 거래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블록체인의 효율성을 높이 사기 때문인 셈이다.
셋째, 규제기관과 정책당국의 태도가 규제 중심에서 제도화·실증 지원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국은 토큰화 자산을 기존 금융규제 안에서 인정하는 제도를 정비하고, BIS와 중앙은행들도 토큰화 예금·중앙은행 화폐를 활용한 결제 실험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 전환이 RWA를 민간의 기술 실험에서 제도권 금융 인프라로 확장시키는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
대표 사례는 블랙록의 비들(BUIDL)이다. 미국 국채·현금·환매조건부채권 등에 투자하는 펀드를 이더리움 등 퍼블릭 블록체인에서 토큰화한 상품이다. 2026년 8월 운용 규모가 약 26억 달러다. 거래소 등 외부 디지털자산 생태계에서 담보로 활용할 수 있어, 국채형 펀드가 이자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금융거래에 담보로도 활용되는 소위 일하는 자산인 점이 특징이다.
반면 JP모건의 키넥시스(Kinexys)는 은행이 통제하는 프라이빗(허가형) 블록체인 인프라다. 즉, BUIDL이 기존 금융상품을 퍼블릭 블록체인 생태계로 가져오는 방식이라면, Kinexys는 블록체인의 효율성을 은행의 통제된 금융망 안에 적용한 방식인 셈이다. 다만 최근에는 이 경계도 허물어지고 있다. JP모건은 토큰화 MMF를 퍼블릭 이더리움으로 확대하고, Kinexys를 기존 금융시스템과 공개 블록체인을 연결하는 중간 인프라로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폐쇄형에서 시작한 은행 블록체인이 점차 외부 온체인 시장과 연결되고 있단 얘기다.
DeFi가 전통금융 자산을 받아들이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Aave의 Horizon에서는 토큰화 국채와 펀드 등을 담보로 맡기고 스테이블코인을 빌릴 수 있다. 국채형 펀드를 매각하지 않고도 온체인에서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블랙록 같은 운용사 등이 토큰화 국채나 펀드를 DeFi의 담보로 보내고, 에이브(Aave)는 이를 기초로 대출을 제공한다. 양쪽이 서로의 시장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RWA의 융합 성격이 가장 뚜렷하다는 게 시장 평가다.
어떤 효과가 있나. 우선 금융자산의 활용도가 크게 높아진다. 국채와 펀드는 단순한 투자자산에서 24시간 이동 가능한 담보로 바뀌고, 스마트 계약을 이용한 동시 결제로 결제 시간과 비용도 줄어든다. 전문가들은 중장기적으로 투자·결제·대출·담보 관리가 서로 다른 시스템에서 이루어지는 현재 금융구조가 새로운 프로그래머블 금융망으로 연결될 거라고 전망한다.
물론 토큰화 자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자산과 토큰의 법적 권리를 일치시키고 발행사 파산 시 투자자를 보호해야 하며, 수탁·스마트 계약·오라클 위험과 서로 다른 블록체인의 상호운용성도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 토큰화 자체가 곧 유동성 증가는 아닌 만큼, 실제 거래와 담보 활용의 확대 여부가 중요하다.
이를 고려하면 우리나라도 토큰 증권을 현재의 비정형 조각 투자에서 정형 증권 전반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업계에선 2027년 토큰 증권 제도 시행을 계기로 국채·MMF·펀드 등 표준화된 금융상품의 토큰화를 우선 검토할 필요가 있단 얘기가 나온다. 또 한국은행이 아고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만큼, 프로젝트에서 축적한 토큰화 화폐 및 결제 경험을 향후 RWA 결제 인프라와 연계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지난 5년간 연 80%의 RWA 성장은 전통금융과 DeFi의 융합이 단순한 기술 실험에 그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 금융경쟁의 핵심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대체하느냐가 아니다. 전통 금융이 가진 법적 신뢰와 DeFi가 가진 24시간 거래·자동결제·프로그래머빌리티를 누가 가장 효과적으로 결합하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이 될 거란 생각이다.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 겸 AI디지털경제금융포럼 의장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 겸 AI디지털경제금융포럼 의장 정유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