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민의 디지털 창업사] 〈8〉IT혁신의 숨은 엔진, 병역특례의 명암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전자신문 명예기자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전자신문 명예기자

실리콘밸리의 창업이 차고(Garage)에서 이뤄졌다면, 우리나라 정보기술(IT) 혁신의 요람은 어디였을까? 벤처 1·2세대가 일군 눈부신 성과는 우연한 영감의 산물이 아니었다. 1990년대 테헤란로를 뜨겁게 달군 진짜 엔진은 바로 병역대체복무제도(전문연구요원·산업기능요원)였다. 병역이라는 국가적 의무와 청년들의 커리어, 신생 벤처의 연구개발(R&D) 수요를 하나로 묶어낸 이 제도는 최고급 인재를 벤처 생태계로 쏟아부으며 유례없는 한국형 IT 압축 성장의 신화를 완성했다.

자금력과 인지도가 부족한 신생 벤처는 대기업과의 인재 쟁탈전에서 번번이 패배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한 줄의 정교한 코드가 기업의 존폐를 가르는 소프트웨어(SW) 스타트업에 고급 엔지니어 확보는 생존 그 자체였다. 1973년 중화학 기간산업을 위해 출범했던 병역특례 제도가 1990년대 IT 혁명기에 이르러 결정적 도약대로 탈바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는 법적 강제력을 지닌 병역 의무를 지렛대 삼아 서울대, KAIST, 포항공대 등 최고급 이공계 인재들을 자본력 없는 신생 벤처의 R&D 부서로 대거 유입시키는 배타적 인적 파이프라인을 구축해줬다. 스타트업이 짊어져야 할 막대한 인재 탐색 비용을 국가가 대신 분담해 준 덕분에, 초기 벤처들은 유례없는 인재 프리미엄을 업고 독자적인 기술 자산과 비즈니스 모델을 빠르게 완성해 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오늘날 대한민국 디지털 생태계를 이끄는 주요 온라인 포털과 모바일 플랫폼, 게임 기업 창업자의 상당수가 바로 이 병역특례 출신이다. 벤처를 이끈 수많은 주역들은 전문연구요원 복무를 통해 데이터 인덱싱과 분산 트래픽 제어 등 당시 최첨단 IT를 연마했다. 특히 몇 년간의 복무 기간 동안 R&D에만 집중 몰입할 수 있었던 환경은 압도적 기술적 성과를 일궈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때 축적된 탄탄한 기술 자산은 포털과 거대 플랫폼을 탄생시킨 결정적 기초가 됐다. 게임 업계 또한 병역 해결을 위해 모여든 최고 수준의 개발진을 기반으로 초기 자본난을 극복했다. 집중적인 R&D를 통해 빠른 개발 속도와 지식재산권(IP)을 확보함으로써 신생 벤처들이 글로벌 무대로 도약하는 원동력을 확보했다.

대체복무를 위해 한데 모여든 엔지니어들은 직장 동료를 넘어 공동 창업 파트너십으로 진화했다. 병특 지정업체의 연구실은 그 자체로 기술 혁신이 움트는 발원지이자, 동업 관계를 미리 시험하고 검증하는 실질적인 민간 액셀러레이터로 작동하며 수많은 창업가를 배출해냈다.

그러나 화려한 성공 이면에는 국가의 징집 권력에 편승한 노동 왜곡이라는 그늘이 있었다. 경영진은 병역 의무라는 점을 악용해 저임금과 가혹한 장시간 철야 근무를 업계 관행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복무 만료와 함께 절반 이상이 회사를 떠나면서, 어렵게 축적된 기술과 지식이 유출되는 R&D 누수를 겪어야 했다.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 역시 극심해 불법 파견과 비연구성 외주 강제 투입 등 편법이 만연했고, 이는 대대적인 비리 수사와 IT 분야 보충역 배정 축소라는 부끄러운 흑역사로 이어졌다.

인구 절벽으로 군 병력 자원이 급감하면서, 반세기 동안 디지털 벤처의 버팀목이 되어준 저비용·고학력 개발자 유입 통로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테크 스타트업 역시 병역특례라는 국가 제도에 기대어 핵심 인재를 지원받던 과거의 관성에 안주할 수 없다. 선진적 인적자원관리로 근본적인 체질 전환을 이뤄내기 위해 기업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걸맞은 성과 연동형 보상과 스톡옵션을 도입해 우수 인재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 정부 역시 쿼터 감축에 그칠 것이 아니라, 국방 AI와 사이버 보안 등 첨단 안보 수요와 민간 R&D를 정교하게 엮어내는 지능형 상생 거버넌스로 정책의 틀을 고도화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디지털 창업 신화는 청년 엔지니어들이 병역 의무라는 결정적 시기에 쏟아부은 열정과 헌신을 통해 일궈낸 결실이었다. 이제 다음 세대 디지털 창업이 지속 가능하게 도약하려면, 과거의 제도적 수혜를 넘어 정당한 시장 보상과 수평적인 조직 문화, 그리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진짜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대한민국 디지털 벤처의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전자신문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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