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진의 AI시대 스토리노믹스] 〈1〉프롬프트가 된 플롯:생산 주기가 무너진 자리

전대진 前 스토리위즈 대표
전대진 前 스토리위즈 대표

소설 한 편이 독자를 만나기까지 평균 1년이 걸리고, 웹툰 IP 하나를 세우려면 1년 6개월이 넘는다. 소재를 찾고, 세계관을 세우고, 캐릭터를 만든 다음 한 회씩 이야기를 쌓아 올린다. 손으로 하는 일이다. 그 사이 시장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독자는 더 빨리 더 자주 읽고 싶어 하는데 작가는 매주 마감에 쫓긴다. 플랫폼은 신작을 더 빨리 내놓으라 하고, 작가는 이미 한계까지 밀려 있다. 이 시차가 이 산업의 오래된 숙제였다. 지금 세대 독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새 회차를 확인하는데, 그 리듬을 못 맞추면 이탈은 순식간이다.

여기에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들어왔다. 오탈자를 잡고 배경을 칠하는 수준이 아니라, 기획부터 유통까지 이어지던 순서 자체가 무너졌다. 기획 다음에 집필, 집필 다음에 연재였던 공정이 이제는 동시에 돈다. 가장 크게 바뀐 곳은 기획이다. 장르와 키워드, 타깃만 넣으면 로그라인 수십 개가 몇 초 만에 나오고, 설정이 어긋나거나 이야기가 늘어지는 구간도 잡아준다. 예전 같으면 며칠 걸리던 시놉시스 회의가 이제는 초안을 앞에 놓고 시작한다. 몇 주 걸리던 일이 실시간이 됐다. 무한 연재와 빠른 호흡을 원하는 글로벌 팬덤 앞에서 AI는 이제 선택이 아니다.

그런데 현장은 다르다. 만드는 시간을 10분의 1로 줄였다고 해서 값이 10배 오르지는 않는다. 여기에 스토리노믹스의 역설이 있다. 생산 공정이 빨라진다고 흥행 공식이 바뀌는 건 아니다. 여전히 좋은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 사이의 간극이 승부를 가른다. 오히려 원고가 많아질수록 그 간극은 더 잘 보인다. 빨라진 만큼 더 많은 이야기가 시장에 쏟아지고, 그 안에서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은 더 희소해졌다.

필자는 이걸 숫자로 겪었다. 스토리위즈에서 확보한 웹툰과 웹소설 IP가 1000개쯤 됐는데, 그 중 영상으로 만들 만하다고 판단한 것은 100개 남짓이었다. 열에 하나다. 원천을 많이 갖는 것과 가치를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웹소설과 웹툰을 오래 다루다 보면 이야기 하나가 통과하는 관문이 여러 개라는 걸 알게 된다. 연재 반응, 편집자 판단, 플랫폼 노출, 마지막으로 영상 제작사의 선택. 관문마다 걸러지는 비율은 조금씩 달랐지만 방향은 같았다. 관문이 많아질수록 남는 이야기는 줄어들었다. 케이툰과 블라이스, 두 플랫폼을 함께 운영하면서 그 흐름을 계속 지켜봤다. 원고는 늘어도 좋은 이야기가 그 만큼 늘지는 않았다. AI가 원고 자체를 늘려주는 지금도 이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병목은 만드는 속도가 아니라 골라내는 눈에 있었다. 그 관문을 다 통과한 이야기라 해도 흥행이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이 산업은 예측이 어렵다.

더 거슬러 올라가도 같은 얘기가 나온다. 1999년 필자는 벨소리를 팔았는데, 노래 한 곡을 통째로 내려받는 값이 500원이고 벨소리는 1500원이었다. 몇 마디 토막이 전곡보다 세 배 비쌌는데도 벨소리가 더 팔렸다. 사람들이 산 것은 음악이 아니라 남들 앞에서 울릴 자리였다. 값을 매기는 기준이 완성도가 아니라 그 순간의 쓸모였다는 뜻이다. 누구나 그럴듯한 플롯을 찍어내게 되자 시장에 아류작이 넘쳤고, 독자들은 이미 알아챘다. 매끄럽지만 차가운 맛. 그 피로 때문에 오히려 거칠어도 사람 냄새 나는 글을 찾기 시작했다. 속도가 무기였던 시절은 끝났다. 지금은 속도를 가진 다음에 무엇을 하느냐가 무기다. 그 때 배운 건 값을 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값을 느끼는 사람이 시장을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야 한다. AI가 인간을 대체할 것인가가 아니라, AI를 쓰는 쪽이 못 쓰는 쪽을 대체한다는 것이 이미 정해진 답이다. 핵심은 활용이 아니라 지배력이다. AI가 플롯을 짜줄수록 그중에서 고르고 비틀고 감각을 불어넣는 일이 중요해지는데, 그게 디렉팅이다. AI는 창작자의 자리를 빼앗는 약탈자가 아니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정한 속도로 달리게 해주는 러닝머신이다. 엔진은 기술이 맡되 핸들은 사람이 쥐어야 한다. 문제는 그 핸들을 쥐는 법을 아직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AI 도구가 이렇게 넘치는데 대형 IP는 안 나오는가. 현장의 아킬레스건부터 봐야 한다.

전대진 前 스토리위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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