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전자무역의 출발점은 1991년 '무역업무자동화 촉진에 관한 법률'이었다. 수작업으로 제출하던 무역서류를 EDI 전자문서로 바꾼 조치다. 1999년 전자거래기본법(現 전자문서법)이 전자문서의 법적 효력을 세웠고, 전자문서에 전자서명을 해 효력을 부여하는 법적 기반도 이 즈음 갖춰졌다. 초고속 인터넷망이 구축되면서 국가 전자무역 서비스(uTradeHub)는 통관·물류·금융을 단일 창구로 묶었다. 종이를 없애고 서식을 표준화하며 창구를 단일화한 30여년의 여정이었다. 필자는 이 모든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현장에서 실무 책임자로 업무를 수행해 왔는데, 이때 주목할 점은 그 대상이 언제나 '전자문서'였다는 것이다.
앞으로 모든 수출 상품에는 디지털제품여권(DPP)이 부착된다. DPP는 단순한 문서가 아니며 제품마다 고유 식별자를 부여하고 원료 채굴부터 폐기까지의 탄소발자국, 재활용 원료 비중, 실사 정보를 조회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도록 요구한다. 제품 공급망 데이터를 전주기 동안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ESPR 13조 규정에 근거해 26년 7월 EU Central DPP Registry를 개통했고 8월에는 배터리 패스포트가 담아야 할 데이터 71개 항목에 대한 가이던스를 발표했다. 배터리 분야의 DPP는 2027년 2월부터 시작되고 철강과 섬유가 뒤따른다. 이 때 데이터는 한 곳에 모이지 않는다. 각 기업이 원본을 보유한 채 검증된 신원과 합의된 사용 규칙에 따라 필요한 값만 공유한다. 이 구조가 데이터스페이스(Dataspace)다. 각 기업이 원본을 보유한 채 검증된 신원과 합의된 규칙에 따라 필요한 값만 공유한다. 이처럼 데이터 주권(Sovereignty)과 신뢰(Trust)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데이터스페이스의 기본 원리다.
전자문서 시대의 과제가 '서식'을 맞추는 일이었다면, DPP 및 데이터스페이스 시대는 무역 공급망 '관계'를 맞추는 일이다. 공급기업에서 데이터를 받고 또 다른 협력사에 데이터를 요구해야 하며, 그 값이 해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실제로 한 배터리 조립기업은 협력사의 비협조와 담당자 교체로 데이터를 모으는 데 힘겹다. 개별 기업의 노력으로 닿지 않는 영역도 존재한다. 고유 식별체계와 조회 라우팅, 데이터 무결성의 대외 보증, 그리고 기업이 사라진 뒤에도 유지되어야 하는 데이터 영속성이다. 이것은 국가가 세워야 할 기반이다.
기업이 직면한 비관세 통상 규제는 늘어가고 이에 대한 대응은 데이터를 품은 전자문서 기반이 될 것이다. 수출기업은 제품 단위 탄소발자국 산정 역량을 내부화하고, 공급계약에 데이터 제공 범위와 갱신 주기, 검증 방식을 명문화하는 것이다. 국가는 DPP 규제를 대응하는 국가적 거버넌스를 확립하고, 신뢰 앵커와 적합성 평가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하며, 운영 주체를 조기에 확정해야 한다. 배터리 여권 시행까지 남은 시간은 다섯 달이다. 30년 전 우리는 문서를 전자화하는 데 앞섰다. 그 성과는 세계 6위의 무역 강국으로 우리 모두를 우뚝 세웠다. 이번에는 무역 공급망 데이터를 연결하는 데 서둘러야 하고 앞서야 한다.
민철홍 KTNET 수석부장 chmin@kt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