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보고서와 계약서 초안을 만드는 일은 이제 낯설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문서를 생성과정과 중간 단계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문서를 쉽게 만들어 내는 시대에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출처와 이력을 증명할 수 있는지다. 진위를 가릴 수 없는 문서는 증거로도, 기록으로도 쓰이기 어렵다.
PDF는 ISO로 표준화된 대표적인 전자문서 형식으로, 행정·금융·법률·출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렇기에 오는 10월 12일부터 16일까지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리는 ISO/TC 171/SC 2 총회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ISO/TC 171/SC 2는 PDF를 비롯한 전자문서 파일 형식과 EDMS, 정보 진본성 등 문서관리 응용 분야의 표준을 다루는 분과위원회로, 이번 총회에는 세계 각국 전문가 7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장기보존을 위한 PDF/A, 접근성을 위한 PDF/UA, 메타데이터 표준인 XMP 등 폭넓은 의제 가운데 특히 '콘텐츠 출처 증명(Content Provenance)'과 'PDF 포렌식'이 중요한 화두로 다뤄진다. 디지털 이미지·영상·문서 등 콘텐츠의 생성과 수정 이력을 검증가능한 형태로 기록하고, 이후 변경이나 변조 여부를 기술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이다. AI 생성 콘텐츠가 급증하는 환경에서 디지털 문서의 출처와 무결성을 확인하기 위한 핵심적인 신뢰 장치가 될 수 있다.
신뢰성만이 과제는 아니다. 구조화된 Tagged PDF는 장애인의 정보 접근성을 높이는 동시에 AI가 문서 구조와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기반이 된다. 접근성과 AI 데이터 품질이 같은 표준 기술 위에서 만나는 셈이다.
14일에는 'PDF Industry Day' 기술세미나도 열린다. 국제 PDF 표준 전문가들이 C2PA와 콘텐츠 출처 증명, AI 데이터 활용, 장기보존 전략, 차세대 PDF 기술 등을 주제로 발표한다. 실제 표준을 설계하는 전문가들에게 직접 듣고 질문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전자문서 솔루션을 개발하는 기업은 물론 기록관리와 접근성 정책을 담당하는 공공기관 관계자에게도 향후 기술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제정된 국제표준을 뒤따르는 기업은 규격 준수에 비용을 치러야 하지만, 표준 제정에 참여한 기업은 산업 현장의 기술적 경험과 요구사항을 적극적으로 제안할 수 있다. 이번 총회에 한컴, SGA솔루션즈, 사이냅소프트, 포시에스, 유니닥스 등 국내 기업이 후원과 발표로 참여한다는 소식이 반가운 이유다.
한국은 전자문서 법제와 행정에 앞장서 온 경험이 있다. 이제 그 경험을 국제표준의 언어로 옮기는 것이 다음 과제다.
ISO/TC 171 국내위원회는 이번 총회를 계기로 국내에도 국제표준 개발에 꾸준히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넓혀가고자 한다. 표준 초안 검토와 의견 제출, 국제회의 참여 지원 등 실질적인 참여 기반을 차근차근 마련할 계획이다.
AI가 문서를 만드는 시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쉬운 문서 생성이 아니다. 누가 만들고, 무엇이 바뀌었으며, 그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신뢰의 규칙을 만드는 국제표준의 자리에 한국의 기술과 경험, 그리고 목소리가 더 크게 담기기를 기대한다.
남동선 ISO TC171-K(문서관리응용) 위원장·엑스엠엘 대표 nam.dongsu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