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은 통신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늘 걸리는 전화요, 찌르릉 벨이 울리면 수화기를 들고 이야기하면 되는 매체로 인식하고 있다. 공기의 중요성을 평상시 인식하지 못하듯 전화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내는 알고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 주변 높은 빌딩과 많은 사람들에게 전화가 어떤 역할을 해준다는 것을 사내는 잘 알고 있었다. 화면 속에 나타난 공중전화가 고장상태이면 주변 전화 모두가 고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음악이 그쳤다.
새로운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 리틀 웜 데드.」
역시 재즈였다.
자유분방한 형식이 던져 주는 재즈는 늘 새롭다.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연주자가 연출하는 즉흥성이 늘 재즈를 신선하게 한다.
재즈는 안과 밖의 구분이 없다. 밝음과 어둠, 빛과 그림자, 표리(表裏)가 없다. 재즈는 홀이다. 구멍이다.
그 홀 안으로 모든 것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새로움을 준다.
20세기 초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에서 생겨난 재즈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그들의 구슬픈 삶의 애환을 가락에 담아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반항적이며 희망적인 리듬.
사내에게도 재즈는 위안이며 희망이었다. 재즈는 섹스였다.
사내에게 세상은 0과 1뿐이었다. 0과 1이면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었다. 세상은 0과 1로 표현되는 논리회로. 하지만 재즈는 그렇지 않았다.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사내에게 재즈와 섹스는 위안이며, 삶이었다.
재즈와 섹스를 통하여 사내는 아이디어를 얻곤 했다. 프로그래머에게 아이디어는 힘이었다. 에너지였다.
논리적인 세상에서 비논리적인 힘, 에너지였다.
재즈와 섹스는 힘과 에너지뿐만이 아니라 소모 뒤에 오는 허무 자체도 쓸어안아 주고 있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구멍, 언제든 숨어 버릴 수 있는 구멍.
재즈였다. 섹스였다. 사내는 그것을 즐겼다.
사내는 다시 리모콘을 조작했다. 화면이 바뀌었다.
凹凸.
흑인 남자의 凸과 백인 여자의 凹가 결합과 분리를 반복하는 모습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
사내는 그때까지 꼿꼿하게 서 있는 자기의 물건을 다시 쓰다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