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FCC, 영국의 ITC, 캐나다의 CRTC 가운데 국내 방송환경에 가장 적합한 방송규제기구의 이상적인 모델은 어떤 것인가.
최근 잇따라 열리고 있는 새방송법 관련 공청회나 토론회에선 새로 출범할 방송위원회의 위상을 놓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 공청회나 세미나에선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 운영하고 있는 방송규제기구가 모범적인 사례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국내 방송환경에 가장 적합한 모델 케이스는 무엇일까에 대해선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정부 여당인 국민회의나 방송사 및 방송관련 단체 등이 각각 자신들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선진국 모델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가 채택해야 할 방송위원회의 위상과 방향을 제시하는 분위기다.
방송위원회의 위상을 놓고 이처럼 격론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20일 국민회의 정책위원회가 「새정부의 방송정책과 방송관계법 개정방향」이란 주제로 개최한 공청회 자리에서 공영 방송사를 관할하는 경영위원회와 상업방송을 관장하는 방송위원회를 별도로 두자는 주장이 제기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날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자로 나선 유재천 교수(한림대)는 방송과 통신의 융합화 추세에 맞춰 미국의 FCC와 같은 성격의 방송통신위원회(가칭)를 설립하되 공영방송사의 경우에는 별도로 경영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이효성 교수(성균관대) 역시 공중파, 유선방송, 위성방송 등의 정책과 행정을 관할하는 방송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공영방송사인 KBS산하에 별도로 경영위원회를 두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현재 공영방송을 관장하는 경영위원회와 상업방송을 관장하는 독립방송위원회를 따로 두는 대표적인 국가는 영국이다. 영국은 BBC산하에 경영위원회와 상업방송 규제기구인 ITC를 따로 설치해 방송정책 및 행정업무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경영위원회와 방송위원회를 따로 구성할 경우 이는 영국의 방송규제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국민회의 신기남 의원 역시 지난달 12일 여의도 클럽이 개최한 새방송법 관련 토론회에서 우리나라는 미국의 FCC모델보다는 영국의 ITC모델과 유사한 형태가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처럼 영국의 ITC방식이 자주 거론되면서 국민회의가 당론으로 이미 영국의 ITC방식을 채택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공영방송을 관할하는 경영위원회와 상업방송을 관할하는 독립방송위원회 구성방안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우리나라의 경우 공영방송과 상업방송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데다 공영방송사인 KBS가 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화되어 있다. 게다가 MBC, EBS, 그리고 케이블TV 공공채널까지 포함하면 공공방송이라고 할 수 있는 방송사가 매우 많다. 이들 방송사에 모두 경영위원회를 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될 경우 상업방송만을 관장하는 방송위원회는 기능이 왜소화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또한 공영방송사에 경영위원회를 둘 경우 집권당의 입김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방송규제기구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선 캐나다의 CRTC방식이 오히려 적합하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을 끌고 있다. 한양대 언론문화연구소가 지난달 26일 개최한 토론회에서 방송개발원 최영묵 선임연구원은 FCC나 ITC방식보다는 CRTC방식이 적합하다는 주장을 개진했다. 최 연구원에 따르면 CRTC는 독립적인 규제기관으로 의회에 책임을 지지만 문화부로부터 제한적인 통제를 받는다. 문화부는 CRTC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 공영 및 상업방송에 관한 감독, 특수 채널관리, 방송관련 국제업무를 관장하지만 문화부와 CRTC가 종속적이라기보다는 대등한 관계에서 상호 견제하고 협조하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도 캐나다처럼 그동안 공보처가 담당했던 대부분 방송관련 정책 및 행정업무를 방송위위원회로 넘기되 방송법인에 관한 사항, 남북방송교류 및 협력에 관한 사항, 방송의 국제교류 및 대외 시장개방 등 업무는 정부부처에서 담당하는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최 연구원의 주장에 대해 방송계에서는 일단 긍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 공론화되고 있지는 않은 상황이다.
한편 방송위원회의 이상적인 모델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과 관련해 업계의 한 전문가는 『최근들어 방송위원회의 독립성 문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며 방송의 독립성 차원에서 방송위원회의 위상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장길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