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콤 222」는 기억 용량이 18KB, 처리속도가 초당 1백만자로 역시 XT급 PC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IBM 1401」보다는 우수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파콤 222」는 총 중량이 35톤이었다고 하는데 5대의 트럭에 나눠 인천 부두에서 서울 회현동까지 운송을 했다고 해요. 경찰 오토바이가 호송을 하고, 운송에만 2백여명이 투입되고, 설치 작업을 하는 데 25톤 기중기가 도입되었다고 해요.』
『컴퓨터가 들어오던 그해 9월에 KIST가 발족했지요.』
『내 얘기가 다른 데로 새었네요.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국비 장학생이 되어 미국 시카고로 갔어요. 시카고 주립대학에 입학해 경제학을 공부하는데 그때 학교에 있는 컴퓨터를 사용해 경영정보 시스템을 연구하는 것을 보고 컴퓨터의 기능에 경이로움을 가졌어요. 나는 재빨리 학과를 바꿔 전자공학을 공부했어요. 그무렵 나는 기업체로부터도 유학 장학금을 받고 있었는데 나에게 혜택을 주던 기업 중 한 곳이 지금 남편이 경영하는 섬유회사였어요. 김 회장이 시카고에 왔을 때 내가 안내를 했지요. 우리는 대학 바로 앞의 호숫가에서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셨어요. 김 회장은 지금도 멋쟁이지만 50대 초였던 그때는 젊고 멋있었어요. 내가 반했다고 할까. 유부남이긴 했지만 돈많은 기업가고 잘생겼으니까 그냥 좋아했던 거죠. 우리는 그날 밤 함께 잠을 잤어요. 나는 그때 남자가 처음이었는데 그가 좀 놀라는 기색이더군요. 놀랄 일이 아니죠. 당연한 일이지. 다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결혼을 안했을 뿐이고 그렇다고 몸을 섞을 만한 애인도 없었으니까 처녀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그후 그는 훌쩍 떠났는데 두어 달이 지나면서 내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았어요. 떼어버릴까 하다가 혹시 몰라서 김 회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지요. 그랬더니 그가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로 왔어요. 그 사실을 알고 시카고로 온 것을 보니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아이를 낳아 키우기로 약속했어요. 달리 말해 나는 그의 첩이 돼버린 것이죠. 그는 출장을 핑계대고 나에게 자주 날아왔고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어요. 나는 국비 장학금이나 기업체의 장학금을 거부했어요. 그 장학금을 받는 대신 제약도 많아요. 김 회장이 후견인이 되면서 나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그 대신 내 가슴에는 첩이라는 강박관념이 떠나지 않았어요. 미국에서 학생 신분으로 아이를 낳아서 길렀죠. 김 회장이 집도 사주고 아이 키울 유모도 붙여 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