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타워]정부, 또 말이 앞서나

 ◆이택 산업전자부장 etyt@etnews.co.kr

이번에도 말이 앞섰다.

 하이닉스반도체와 미국 마이크론의 전략적 제휴 협상 발표 당시부터 진념 경제부총리, 이근영 금감위원장이 “연말께 가시적 성과” 운운하던 것을 두고 우려의 눈길을 보낸 사람들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이 금감위원장이 다시 한번 비슷한 내용을 언급해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 그는 미국 2차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박종섭 하이닉스 사장의 코멘트가 있자마자 “협상이 잘 되고 있고 내년 1월 초 MOU 체결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물론 부총리나 금감위원장이 우리 경제 최대 핫이슈인 하이닉스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또 책임있는 당국자로서 현안에 대한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입장이나 진전된 정보를 공개하는 것도 충분히 있음 직한 일이다. 하지만 하이닉스는 경우가 다르다. 우리 정부는 협상 당사자가 아니다. 물밑에서 마이크론과 어떤 조율을 거치는지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하이닉스 경영진과 구조조정위원회·채권단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정부는 협상 내용을 보고받고 뒤에서 도와주는 역할이면 족하다. 그래서 ‘잘 되고 있다’는 정도의 수위로 충분하다. 여기서 더 나가면 ‘오버’하는 것이 된다.

 우리 정부가 협상 내용을 꼬치꼬치 언급한다면 시장에서는 정부 눈치를 살피게 되고 또 다른 당사자인 마이크론도 하이닉스팀을 제치고 정부를 상대하려는 유혹을 떨칠 수가 없을 것이다. 걱정이 된다는 뜻이다. 이래서는 협상력만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양사가 합병이든 지분 맞교환이든 협상을 한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서로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다. 매우 지리하고 피말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치밀한 계산과 정교한 수순을 밟아도 모자랄 판에 우리는 속내를 너무 쉽게 드러내고 있다. 그것도 정부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앞장서서 보여준다.

 포커판에서는 상대에게 패를 읽히면 곧바로 지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조급하다. 지금까지의 협상 진행과정만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연말까지 가시적 성과’에서 ‘내년 1월 초면 MOU 체결 가능’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동안 마이크론의 공식 언급은 “한국이 요청해서 흔쾌히 응했다” “협상이 진행 중이다” 정도였다. 더구나 ‘1월 초 MOU 가능성’으로 한국 증시가 들떠 있던 바로 그 순간에도 마이크론 대변인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협상 타결 여부를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밝혔다. “협상이 진행 중이지만 시한을 정할 수는 없다”고 한발 더 나갔다. 듣기에 따라서는 하이닉스 협상팀과 한국 정부의 ‘기대’를 뒤짚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저쪽은 의중을 감춘 채 느긋하게 자신의 패를 검토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무리 급한 쪽이 달라든다지만 기왕에 하는 협상이라면 한푼이라도 더 받는 것이 좋다. 국민들은 아직도 말끔하게 해결되지 않는 대우자동차 매각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채권단과 정부는 다급한 마음에 외국 기업의 인수 조건을 차례 차례 들어줬지만 지금도 속을 끓이고 있다. 게다가 정부가 나선 협상 치고 여태껏 제대로 박수받을 만한 사례도 없었다.

 마침 양사 협상이 급진전되는 모양이다. 이제부터라도 말이 빨라서는 곤란하다. 정부가 침묵해도 결과가 좋으면 국민들의 박수는 그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