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한국에서 제조업 못하겠습니다.”
경기침체와 제조업체들의 중국이전이 가속화되면서 이대로 가면 국내 제조업 기반이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지난 수년간 우리는 인터넷, IT열풍에 들뜬 나머지 국내 경제를 이끄는 주요 제조업분야의 산업경쟁력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그 사이 중국경제는 엄청난 해외투자와 인적자원을 기반으로 아시아 주변국의 산업기반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했고 한국제조업도 거센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됐다. 미국 경제의 제조업 경쟁력을 되살리고 일본, 유럽으로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새로운 제조업 모델인 EMS(Electronics Manufacturing System) 산업현황 및 국내 제조업의 대응방안을 4회에 걸쳐 점검해 본다.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정보혁명은 제조업분야에서 범세계적인 생산기술의 평준화를 가져왔다. 같은 제품이라면 미국, 독일에서 만들든 말레이시아, 중국에서 제조하든 질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는 상황이 닥쳐온 것이다.
이처럼 물건 만들기가 기업체의 경쟁력을 보장해주는 시대가 지나면서 첨단 IT제조분야의 유명 대기업들이 생산을 아예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해 세계 2, 3위의 휴대폰 생산업체인 미국 모토로라와 스웨덴의 에릭슨이 잇따라 휴대폰 생산을 포기하고 EMS업체에 제조물량을 맡긴다는 발표로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이는 기업활동에서 수익비중이 제품생산 자체보다는 연구개발과 AS단계에서 더 크게 나오는 추세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정된 회사역량을 부가가치 높은 신제품개발 및 마케팅업무에 주력하고 제품의 생산은 전문적인 외부업체(EMS업체)에 맡겨 기업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의도다.
EMS는 고객기업의 요구에 따라 제품의 설계, 개발에서 생산까지 일괄서비스를 제공하며 복잡한 부품소싱 업무까지 전담해주기 때문에 단순한 OEM 조립가공과 차별화된다.
미국에서는 80년대 이후 전문적인 EMS업체가 속속 등장해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인터넷혁명을 기점으로 전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한 이들 EMS업계는 사업영역을 더욱 확대해 지난해 미국의 EMS시장 규모는 1200억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미국의 성공모델은 주변 아시아 국가를 부품기지로 만들고 일본이 선두에 서는 기러기형 편대전략을 구사해온 일본의 제조업계에도 큰 충격을 가했다.
자존심 강한 일본 제조업체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EMS모델 도입에 적극 나선 것은 최근의 일이다. 유럽국가도 이러한 생산모델 수용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기술, 가격경쟁력, 브랜드파워 무엇 하나 똑부러지게 외국에 내놓기 어려운 국내 제조업계 대부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제는 정부차원의 제조업 살리기 처방전이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그러나 우리나라 제조업 구조는 여전히 대다수 조립·부품업체들이 일부 대기업만 쳐다보는 수직계열화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전세계를 상대로 부품을 소싱하고 광속으로 생산주문을 받아들이는 외국계 EMS 전문업체와의 경쟁에서 우리가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이제는 한국도 개별 중소업체에 사업자금이나 빌려주는 것만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되살아날 것이라고 기대할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나라 제조업계에도 생산을 전담하는 ‘장인집단’을 따로 육성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때가 온 것이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