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월드컵 경기대회의 열기가 채 식지 않았던 지난 여름, 벤처 업계는 한겨울을 걷고 있었다. 한때 1만4000여개에 육박하던 벤처기업 수가 꾸준한 하락세를 보이더니 급기야 7월에는 1만개 아래로 떨어졌다.
올해 사라진 벤처기업 수만 해도 2400여개. 하루평균 6∼7개의 벤처기업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한차례 광풍이 지나고 거품이 꺼지자 정부의 울타리 안에서 햇볕을 받고 자라던 벤처 업계는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
각종 지원정책 하에서 온실속 화초로 자라온 벤처에 가장 먼저 찾아온 시련은 잇따라 발생한 비리 연루 사건이었다. 벤처인들은 언론이나 일반인으로부터 ‘머니게이머, 각종 비리의 진원’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코스닥 시장이 무너지면서 회수에 대한 희망이 꺾인 벤처캐피털들이 창업이나 성장단계에 있는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동결, 자금난까지 겹쳤다.
그러나 여전히 코스닥시장 회복에 대한 기대를 점치기는 이른 시점이다. 신규등록 시장이 올해도 낙관적이지 않다는 데 많은 전문가들이 동조하고 있다. 비관적인 전문가들은 이미 코스닥에 등록된 기업들의 반 이상도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속에 벤처산업의 급성장과 함께 팽창한 벤처생태계도 변화를 겪고 있다.
한 벤처기업가는 최근 이러한 상황을 두고 “벤처업계의 절체절명 상태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골이 깊으면 산도 높은 법. 여기 저기서 재도약을 위해 벤처지형을 새롭게 재편하려는 물밑 움직임이 분주하다. 벤처업계 내부에서도 벤처 본연의 자리를 찾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주도의 벤처정책에서 벗어나 민간이 주도하는 산업으로 바꿔나가자는 움직임이다.
그렇다고 지난 모든 IT벤처정책을 버리자는 주장이 아니다. 지금까지 양적 팽창과 인프라 구축에 주목했다면 이제는 질적 고도화를 이뤄나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벤처가 결국 ‘한국 경제의 미래를 책임질 주체’라는 인식에 공감하고 있는 분위기다.
특히 올해 벤처기업들이 보여준 수출실적은 56억1200만달러로 지난해보다 28.1% 늘어난 것으로 집계돼 전체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벤처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례다.
중국·동남아시아 등 신규시장 진출을 노리는 벤처기업가들이 벌떼처럼 현지 공략에 나서고 있다. 1세대 벤처기업인 휴맥스만 해도 올해 3659억원의 매출실적을 올렸으며 선진국 기업에서 로열티를 받고 있는 벤처기업이 출현하는 등 놀라운 실적을 보이고 있는 스타급 벤처기업이 상당수 존재한다.
벤처업계가 내년초 출범할 새 정부에 거는 기대는 크다. 하지만 이민화 회장 등 벤처 1세대가 청와대와 정부부처를 분주히 오가며 벤처육성을 역설했던 98년과는 자못 다른 분위기다. 이제 민간부문에 벤처산업의 미래를 맡기고 정부는 벤처 주변 생태계를 지원해 간접 지원으로 돌아서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됐다.
최근 벤처 기업가들은 ‘재도약’이란 말에 희망을 걸기보다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다. ‘언제 벤처산업이 제대로 평가된 적이 있었느냐’ 라는 게 대부분의 반응이다. 벤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반영한 듯한 소리로 보이지만 99%는 사라지고 1%만이 성공하는 벤처기업의 특성을 제대로 보라는 주문처럼 들린다. 경기순환 메커니즘상 최근 불황은 당연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때문인지 새로 돌아올 두번째 순환을 준비하자는 분위기가 벤처인 사이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박근태기자 runrun@etnews.co.kr>
■생활속에 파고 들어온 벤처
연세대 4학년에 재학중인 대학생 L씨. L씨와 그 동료들은 지난 5월 연세창업보육센터가 개최한 창업아이디어공모전에서 경쟁팀을 당당히 누르고 우수예비창업자로 선정됐다. 단지 머리속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하나의 자산가치로 평가된 순간이었다.
요즘 그는 학교측이 마련해준 학생창업센터 보육공간 한켠에서 ‘또 다른’ 신화를 꿈꾸고 있다. 자칫보면 창업초 구석방에서 컵라면과 김밥을 먹으면서 기술개발에 몰두했던 벤처 1세대들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자신들은 ‘결코 다르다’고 못박는다. 이들에겐 벤처를 두고 그간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사그라지면서 ‘선배 벤처’들이 남긴 명암을 오롯이 가려내 절대 그같은 전철을 밝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흘러 넘친다.
사실 벤처업계는 여전히 각종 게이트 등 일련의 비리 연루 사건과 2000년 코스닥 주가폭락 사태 때문에 부정적인 인식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상당수의 업계 종사자들과 전문가들은 지난 4년간 벤처가 한국 사회에 남긴 자취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이들은 벤처가 산업·과학기술 분야는 물론 정치·노동·교육·문화 등 각계에 걸쳐 부지불식간 한국 사회를 변화시킨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L씨의 경우처럼 대학이나 기업연구소 연구원, 대학취업예비생, 심지어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창업을 꿈꾸거나 실제 예비창업에 이르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난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대마불사, 규모의 경제로 불리던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술력, 지식을 자산으로 평가받는 지식기반·기술주도형 사회로의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는 벤처 창업열기를 통해 등장했던 안트러프러너십, 즉 기업가정신 제고가 한몫했다.
IT분야는 물론 BT·CT 등 산업이 종다양성을 띠게 된 것은 물론 이를 다시 혼합한 하이브리드형 산업이 자리를 잡았다. 최근 디자인을 비롯해 디지털콘텐츠 산업은 물론 농업과 같은 전통 산업마저도 고부가가치성 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하나의 문화로 평가받는 벤처산업은 기존 기업문화도 크게 바꿨다. 수직형에서 수평형 조직체제로의 개편, 사내기업·스핀오프·아웃소싱 등 기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기업 규모를 슬림화시키는 노력을 일컫는 신조어들이 기업문화의 일상어로 자리를 잡았다.
핵심인력을 확보하려는 기업들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실력파에 대한 몸값이 하늘높이 치솟는 한편 연령별·직급별 임금제도가 파괴된 점도 벤처가 노동시장 변화에 끼친 영향이다. 기업가치 상승에 동반한 인센티브제도의 도입과 평생직장 개념의 붕괴도 변화의 한축이다.
하지만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성공에 대한 기대감만으로 장시간·저임금 환경에서 근무하는 벤처 종사자들의 노동조건은 벤처활황기부터 불황기인 현재까지 문제로 남아있다. 우수인력의 벤처기업 이탈현상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대기업에 비해 열악한 노동조건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센티브제도가 유명무실화되면서 대박의 꿈 한켠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벤처 유관 기관의 새해 포부
정부가 벤처육성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벤처와 관련된 기관과 협회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벤처가 산업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전문화된 벤처 유관기관이 새로이 설립되는 한편 기존 기관이 벤처업무에 손을 댄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부처간 이기주의와 세싸움으로 벤처정책의 일관성이 훼손됐다는 지적이 최근 심도있게 제기되고 있지만 한켠에서는 부처간 경쟁이 산업육성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어찌됐든 이들 기관이 오늘날 벤처산업을 일으킨 주된 역할을 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중소기업청은 현 정부의 육성정책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이미 기술 선도 기업과 같은 초창기 형태의 벤처육성을 주관했던 부처로 꼽힌다. 최근 정부 5년간의 벤처지원정책을 점검하는 자리에서 중기청은 지금까지의 직접 지원정책에서 벤처생태계를 고도화하는 간접지원정책으로 선회할 것으로 알려졌다. 벤처기업 수를 무리하게 확대하기보다는 경쟁력을 갖춘 기업군으로 육성한다는 목표다. 이에 따라 중기청은 오는 2007년 벤처에 대한 지원기능을 민간으로 완전히 이양한다는 계획 아래 벤처캐피털, M&A시장, 코스닥시장 등 벤처 주변 인프라의 기능을 강화하고 무늬만 벤처인 기업을 철저히 가려낸다는 세부 추진계획을 마련했다.
중기청은 또 비교적 벤처투자기반이 잘 조성된 싱가포르·영국 등 국가와 동등한 수준인 GDP대비 0.2%에 상당하는 1조원의 정부출자 규모를 유지하고 프리코스닥 유동화 펀드 등 세컨더리마켓을 조성, 캐피털업계 건전화를 도모할 방침이다.
이밖에 공공구매 사업, 해외진출 지원확대를 통해 제품판매에 어려움을 겪는 벤처업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 주겠다는 계획이다.
정보통신부도 내년도 IT 중소벤처기업에 대한 정보화 촉진기금 융자사업 규모를 3560억원으로 확정하면서 육성정책을 계속 펴나갈 계획이다. 설비투자 자금지원 한도를 늘리는 등 실효성 제고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정통부가 지난해말 발표한 올해 정보화촉진기금 융자사업 기본계획에 따르면 IT설비투자확대지원사업 560억원(현금지원 460억원, 임대지원 100억원), 정보통신응용기술개발지원사업 2000억원(기술담보대출 1000억원 포함), 선도기술개발지원사업 1000억원 등 총 3560억원의 IT설비투자 자금과 기술개발 자금이 벤처업계로 흘러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산학협력단 출범과 구매조건부 기술개발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인적자원부와 국방부도 각각 산학협력을 통한 기술 위주의 벤처기업 육성과 국방 벤처 양성 사업을 더욱 활발히 벌일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는 콘텐츠산업 관계 기관들의 움직임도 심상찮다. 디자인벤처를 육성하고 있는 디자인진흥원은 벤처 브랜드 강화를 지원키 위해 내년에도 각종 벤처디자인대상, 디자인벤처 비즈니스 공모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갈 계획이다. 진흥원이 주축이 돼 지난해 결성한 디자인펀드 1호에 이어 지자체·민간 재원과 결합한 제2호 펀드의 등장 여부에 귀추가 주목된다. 올해 내내 지속된 투자위축 분위기로 펀드조성이 내년 상반기 이후로 미뤄지긴 했지만 진흥원측은 디자인벤처 육성에 제2호 펀드의 역할이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문화관광부 업무 추진기관인 문화콘텐츠진흥원도 문화산업진흥기금 지원과 창업보육업무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음악,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 모바일·인터넷콘텐츠, 만화, 출판 분야의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업무를 계속한다.
민간에서 벤처지원에 나서고 있는 전국경제인연합은 최근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바이오벤처기업들을 지원하는 방안으로 대기업과의 짝짓기 사업을 본격 출범시켰다. 전경련 내에서 벤처기업 관련 업무를 주관하고 있는 산업협력재단은 올해 이미 185개 우량 벤처기업을 선정, 최근 투자촉진 및 대기업과 연계를 모색하고 있으며 향후 추진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등 최근 내년도 사업계획 마련에 분주하다.
<박근태기자 runru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