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을 알리는 영국 그리니치. 이곳에 새 천년의 희망과 번영을 이루려는 심장 소리가 고동쳤다. 이 심장 소리는 바로 컴퓨터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진 가상 심장(Virtual Heart)이었다.
컴퓨터 안에 심장은 다채로운 색깔의 진동으로 그 생생함을 전했다. 마치 살아있는 착각을 불러온 심장은 그 자체 만으로 영국 새 천년의 희망을 제시하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영국 하면 떠오르던 안개 낀 런던, 여왕, 전통에 대한 자존심 등 보수적인 이미지를 벗고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그들 조상의 정신이 가상 심장을 통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영국 정부는 밀레니엄 행사를 준비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영국의 과학기술을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때 선정된 것이 바로 컴퓨터 화면에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간세포나 장기를 올려놓고 생명 현상을 파악하는 피지오믹스(Physiomics·생리체학)였다.
인체에 나타나는 수만 가지 가능성과 정보를 집대성하고 이를 다시 정보기술(IT)을 이용해 시뮬레이션 하는 피지오믹스. 실험용 쥐나 동물에 행해지던 임상실험은 물론 인체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의 단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기술이다. 전세계 과학자들은 컴퓨터 속에 ‘가상 세포’에서 ‘가상 장기’ 나아가 ‘전자 인체(e-body)’를 만들기 위한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의 나라로 탈바꿈하고 있는 영국, 그것도 세계적인 명문 옥스퍼드대학에서 이 열기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생리학의 과감한 변신=옥스퍼드 대학의 생리학(Physiology)은 이미 83년부터 새로운 변화를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생리학은 본래 생명현상이라는 복잡 미묘한 현상을 깊이 파헤쳐 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설명하려는 학문이다.
옥스퍼드대학 생리학과는 단순히 세포 내부의 미세구조를 관찰하거나 생물체의 기능을 수행하는 조직이나 기관을 연구하는데 머무르지 않았다. 옥스퍼드는 컴퓨터라는 말이 생소했던 때부터 단순히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는 생리학을 버리고 전자생리학(Electrophysiology)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데니스 노블 교수는 “이런 연구는 단순히 생물학이나 의학의 한 부분으로 여겨졌던 생리학을 완전히 독립적인 학문으로 자리잡게했다”며 “오늘날에 와서는 가상 세포에서 가상 인체를 구현하는 핵심 분야로 떠오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 전자생리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연구한 것이 물고기의 조직과 외부와 접촉이 있으면 잎이 접히고 축 늘어지는 식물인 ‘미모사(Mimosa)’”였다며 “동물과 식물의 조직을 전자적으로 구현해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데니스 노블 교수팀은 동물과 식물에서 시작한 연구로 가상 심장을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핵심 기관인 심장을 수학 방정식을 이용해 구현했다. 심장의 생화학적, 전기적, 기계적 작동을 그대로 모방해 컴퓨터 안에 살아 숨쉬는 심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노블 교수는 “의학과 수학, 공학의 결혼이야말로 21세기의 과학”이라며 “옥스퍼드대는 수학과 컴퓨터 의학 사이의 공동연구를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전통만을 고집할 것 같은 옥스퍼드. 그 곳에서는 새로운 과학에 대한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열정이 고집스레 남아 새로운 과학기술로 이동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피지오믹스=피지오믹스는 생명과 자연을 의미하는 ‘피지오(Physio)’와 전체를 뜻하는 ‘옴(ome)’이 합쳐진 피지옴(Physiome·생리체)을 연구하는 분야다. 생물체를 이루는 유전자와 단백질 등이 어떻게 상호작용해 생명현상을 유지하고 질병을 일으키는지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후 컴퓨터상에 가상세포와 장기, 가상인간을 제작해 이용하는 것이다.
인간게놈프로젝트를 통해 나무를 봤다면 피지옴은 숲을 보는 학문이다. 유전자를 하나하나 규명하기보다 인체란 전체적인 시각에서 유전자 간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연구다.
피지옴 연구를 통해 실제 살아있는 것 같은 가상 세포모델을 만들면 신약을 개발할 때 세포에 약물정보를 넣어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다. 동물실험과 인체 임상 등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 과정을 줄이고 더욱 빠르고 저렴하게 난치병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특히 피지옴은 생명현상이란 숲을 보기 위해 IT를 동원한다. 게놈이 유전자를 분자 단위까지 파고들어가는 미시적 개념이라면 피지옴은 IT와 BT가 협조해 생명현상을 밝혀내는 거시적 개념이다.
◆ 인터뷰 - `가상심장` 산파역 옥스퍼드대 데니스 노블 교수
“세포와 조직 등 생물학적 데이터베이스가 증가하고 이를 계산할 수 있는 컴퓨팅 파워가 높아지면서 유전자부터 조직, 인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능을 알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상에 가상 심장을 구현한 영국 옥스퍼드대 데니스 노블 교수. 그는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완성으로 신약개발에 가속도가 붙었지만 그것만으로 불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신약 개발에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들이고 있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그들이 찾은 후보 물질의 1%의 가능성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신약 개발에 실패하면 5억 달러 이상을 손해보는 것입니다.”
노블 교수는 신약 개발은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고 실패는 매우 비싼 대가를 요구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바로 컴퓨터 기술의 활용에 있다고 설명했다.
“다들 컴퓨터를 활용해 의학과 약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 기술을 아우르는 전문가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계적인 심장병 전문가 노블 교수는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독학으로 컴퓨터와 수학을 배우며 생리학과 약학 지식을 접목하는데 열정을 쏟고 있다. 자신이 알지 못하면 학생이나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열정이 그대로 담아 가상 세포 덩어리로 이루어진 가상 심장 모델을 만들었다. 이 모델은 가상의 산소와 당을 소모하며 실제로 심장처럼 뛴다. 이 심장에 약을 투여하면 어떤 약이 심장병에 효과가 있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확인할 수 있다.
“기술 간 융합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인간의 삶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 것입니다. 이미 가상 심장으로 대표 되는 피지옴 기술은 실제 신약 개발에서 그 정확성과 안전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97년 미 식품의약국(FDA)은 다국적 제약회사 호프만 라로슈가 신청한 고혈압 치료제 ‘미베프라딜’에 대해 100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다시 임상시험을 해 안전성을 확인해 줄 것을 요구하며 허가를 보류했다. 그러나 라로슈는 100명에서만 임상시험을 실시하고 나머지는 피지옴 이론을 이용한 가상심장을 통해 안전성을 확인하고 허가를 받는 성과를 거뒀다. 900명에게 임상시험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비용을 절감했다.
“생명과학과 정보기술의 결합은 피지옴이란 새 학문을 만들어냈고 포스트 게놈시대 새로운 키워드로 ‘피지옴’을 자리매김하게 할 것입니다.”
노블 교수는 피지옴분야에서 IT 강국인 한국이 좋은 위치에 서 있다며 IT와 다른 분야를 접목할 수 있는 전문가를 키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김인순기자 insoo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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