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일본이 교과서 문제를 다시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 이 주제를 논하기가 조심스러웠을 듯 싶다. 대지진의 충격으로 전 지구촌의 동정심이 고조된 마당에 ‘극일’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자니 말이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도 독도 교과서 문제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을 뿐”이라고 표현했다. 이 참에 한국의 부품소재 산업을 확실히 키우는 계기로 삼자고 말하고 싶었다. 일본 대지진 직후부터였다고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예상한대로 세계 시장을 좌우하는 일본산 부품·소재의 수급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실제 전자·자동차 업종을 필두로 생산 차질 현상이 가시화하고 있다. 우리나라 업계도 심각한 타격을 염려하고 있다. 대일 부품·소재 무역적자 규모가 지난해 243억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또 다시 갈아치우며 해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와중에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최근 한 강연에서 국내 대기업이 정부보다 더 관료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한 발언에 마음이 갔다. 대기업들의 관료주의적 관행이 낳은 폐해가 어쩌면 이리도 국내 부품소재 산업의 현주소와 딱 들어맞을까 싶어서였다. 단기성과에 급급해 2∼3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모습을 관료주의의 일면이라고 전제한다면 말이다.
부품소재 산업의 경쟁력은 절대 단기간에 끌어올릴 수 없다. 품목에 따라 다르지만 일본을 잡을 수 있는 핵심 소재 하나를 내놓으려면 오랜 시간의 연구개발(R&D)과 수 백억원 단위의 양산 투자가 소요되기도 한다. 이 정도 여력을 갖춘 곳은 아마 중견기업 부류에서도 드물 터다. 하지만 구매 대기업이 국산화에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시늉내기식 국산화 정도로 일본산 제품의 구매 단가를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국내 업체를 주력 협력사로 육성하겠다면 말이다.
안정된 품질의 외산 제품을 계속 사서 쓰는 게 단기성과에 더 낫다는 구매 현장의 관행을 이제는 바꿀 때다. 결국 최고위 경영층의 인식 전환이 현장에 전달돼야 하는 셈이다. 대지진 충격을 계기로 다시 한 번 한국 부품소재 산업의 극일을 생각한다. 이를 최전선에서 이끌어갈 주체가 누구일지 더욱 뚜렷해 보인다.
서한 국제담당 차장 h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