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정의 어울통신]망 중립에서 망 공존으로

이번에는 시스코다. 지난주 시스코의 존 체임버스 회장은 앞으로 급증하는 트래픽에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통신 블랙아웃`과 같은 어려운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래 네트워크 시장 변화에 가장 민감한 글로벌 장비 업체 수장이 직접 `네트워크 위기론`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시스코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또 다른 장비 업체인 알카텔루슨트도 `트래픽 폭발시대론`을 제기했다. 미국 통신사업자인 버라이즌도, 영국 통신사업자인 브리티시텔레콤도 트래픽 급증의 위험성을 언급했다. 통신망 블랙아웃 가능성 언급에 다름 아니다.

그 가능성이 우려 수준을 넘어섰다. 현실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전력망 블랙아웃 사태처럼 파괴력이 큰데, 미리 예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통신망은 금융·산업·국방·정치·외교 등 국정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사전예방원칙이 나오는 이유다. 이미 일본에서 몇 차례 대규모 통신망 불통사태가 일어났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망 불통사태를 경험한 바 있다.

급기야 망 중립성이 다시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망 중립성은 누구든 차별 없이 자유롭게 망에 접속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비차별, 상호접속, 접근성이 근간이다. 트래픽 급증과 관리의 핵심인 이유다.

전제는 선순환 구조다. 인터넷을 예로 들면 간단하다. 인터넷 보급 초기에는 통신사업자가 네트워크 투자로 콘텐츠 업체에 성장 기회를 제공하고, 콘텐츠 업체는 서비스로 이용자의 인터넷 가입을 촉진했다. 상호보완 관계를 구축했다는 얘기다.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자 트래픽 증가가 폭발적이다. 국내 최대 이동통신사업자 SK텔레콤의 지난 1년간 모바일 트래픽은 무려 37.5배 증가했다.

문제는 통신시장의 가입자 포화로 통신사업자의 수익은 정체되고 있는 반면에 망 투자비용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개발과 망 투자로 망라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현재로선 미국식 규제 철학이 우세하다. 유럽에 비해 미국식 망 중립성은 인터넷 도입 초기부터 개방형 망구조와 인터넷망 간 무정산을 기반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네트워크 중립성 개념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망 독점을 막기 위해 출발한 덕분이다. 근래 들어서는 구글·애플·아마존·페이스북 등 미국 기업의 글로벌 전략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유럽 국가들의 논의 구조를 살펴보자. 영국·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은 대부분 데이터 트래픽 문제를 해소하고 망 투자를 유인하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과거 미국보다 더 강력한 인터넷망 개방 정책을 시행해 온 국가들이다. 망 중립성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다가 설비투자 경쟁에서 뒤처져 인프라 후진국으로 전락한 데 따른 반작용이다.

논의가 트래픽 관리와 망 차별화로 집중되고 있음을 주목할 일이다. 개념 자체보다는 실제로 이용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데이터 폭증에 해결책을 모색하는 전환적 사고에 관심을 갖자는 것이다. 대다수 일반 이용자를 보호하고 망 투자를 활성화할 `공존과 상생`의 환경을 고민할 때다.

정책은 타이밍이다. 정책이 지연될수록 스마트 시대의 주도권을 잃고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라는 지위마저 내놓아야 한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기존의 망 중립성 문구에만 매달릴 일이 아니다.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이 아니라 현실성·구체성을 담보한 망 공존과 상생의 후속 정책으로 이어져야 한다.

박승정 정보사회총괄 부국장 sj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