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산업에서 서비스업이 50%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곳. 이 세 가지 말만 들으면 누구나 서구 어느 나라를 먼저 생각할 법하다. 한 때 동남아시아의 강국이었던 필리핀을 수식하는 말이다.
필리핀(Philippine)이라는 국가명이 당시 스페인 국왕 이름 펠리페에서 따왔을 정도로 오랜 식민지의 아픈 역사는 곳곳에 상흔을 남겼다. 1521년 마젤란이 사마르섬에 상륙한 지 20년 후 필리핀은 유럽의 맹주 스페인 손에 떨어진다. 그 후 무려 330년간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강화조약에 따라 필리핀은 다시 미국의 식민지가 됐다. 세계 2차 대전 중이던 1940년대 초반에는 약 3년 동안 일본에 점령되기도 했다. 1946년 미국으로부터 독립해 겨우 제대로 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필리핀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경제 원조를 할 정도로 부강한 국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막사이사이 대통령 사후 리더십 부재와 독재 정권의 부패가 극에 달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가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필리핀만이 유일하게 가톨릭을 믿고 영어를 여전히 공용어로 쓴다. 다른 아세안 국가와 차별화되는 필리핀만의 독특한 점이다.
산업 구조 역시 다른 아세안 국가와 확연히 다르다. 서비스업 55%, 제조업 31%, 농수산업 14%순의 비중이다.
제조업이 취약해 공산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자국 내 제조업도 외자 기업이 주도하고 있으며, 전자·의료 등 재수출용 산업이 주를 이룬다. 특히 반도체는 전체 수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품목이다. 필리핀은 세계 반도체 생산의 2%를 담당하고 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하향세를 보이던 필리핀 내 외국인 투자가 증가세로 돌아선 것은 2009년부터다. 중국 내 최저 임금이 치솟고 투자 여건이 악화되면서 대체 투자지로 수혜를 본 셈이다. 이 때부터 필리핀 제조업이 다시 날개를 폈다.
한국은 일본·네덜란드·미국에 이어 네 번째로 필리핀에 많이 투자하는 나라다. 필리핀 외국인 투자의 7~8%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 기업이 필리핀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분야가 바로 제조업이다. 에너지·부동산·관광·광물 등의 업종에도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자하고 있다. 필리핀 정부가 한국 기업에 각별히 신경쓰는 이유다.
지난해까지 우리나라가 필리핀에 누적 투자한 금액은 30억달러 수준으로 추정된다. 전체 해외 투자 중 4~5% 비중에 불과하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95%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필리핀에는 투자위원회(BOI)·경제자유구역청(PEZA)·수빅자유구역관리청(SBMA)·클락개발공사(CDC) 등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기관이 다원화돼 있다. 기관마다 제공하는 인센티브도 제각각이다. BOI는 필리핀 기업과 동등한 수준으로 법인세 면제 기간 이후 30%의 법인세를 내도록 하고 있다. PEZA는 법인세 면제 기간 이후 총소득의 5%를 내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SBMA와 CDC는 첫 해부터 총소득의 5%를 법인세로 내는 제도를 운영한다.
주대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업 및 업종별로 유리한 제도가 달라 어떤 기관을 파트너로 삼을지 잘 분석해야 한다”며 “전략만 잘 짠다면 부가적인 세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말했다.
필리핀 정부는 투자 활성화를 위해 매년 투자 우선 순위와 세제 혜택 계획을 발표한다. 내수 전략 기업으로 인정받으면 법인세 면제 기간이 8년까지 연장되고, 17년 동안 법인세 50%를 감면받는 파격적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외국인 지분이 40% 이상인 기업이 이 같은 인센티브를 받으려면 수출 중심 기업이나 신기술·신사업 선도자 지위를 인정받아야 한다.
최근 필리핀 정부는 제조업 유치에 적극적이다. 해외 노동자들이 송금하는 자금에 의존하는 현 경제 구조로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국 내 제조 기반이 취약하다 보니 고용 창출 및 수출 산업 육성에 한계가 있다.
필리핀 내 3대 재벌인 아얄라그룹·산미구엘·SM은 제조업보다는 유통·부동산 투자 등에만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자국 기업이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셈이다.
최근 각 기관별 제조업 유치 실적에서 PEZA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앱손·브라더 등 프린터 업체뿐 아니라 글로벌 가전 기업도 PEZA를 통해 라구나·까비떼 등지에 조립 공장을 설립하고 있다. 수빅만 지역에도 다수의 한국 기업이 진출했다.
여러 한국 제조 기업이 PEZA를 거쳐 필리핀에 진출했는데, 4회계연도 법인세 면제와 3년 유예 등의 혜택을 받았다.
백기성 아이엠필리핀 법인장은 “한국 기업은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4+2 회계연도 법인세 면제 혜택을 누리고 있다”며 “PEZA가 지정한 공단 내에서는 12%에 달하는 부가세를 면제받고, 무관세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필리핀 정부의 제조업 유치 노력 덕분에 경제 성장률이 개선됐고, 재정 상태가 개선되면서 인플레이션 압력도 낮아졌다. 경제 호조에 힘입어 필리핀 국가 신용등급도 상향 조정되는 추세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해 5월 필리핀 국가 신용등급을 한 단계 높여 BBB-를 부여했다. 무디스와 피치도 한 단계씩 상향 조정했다.
필리핀의 가장 큰 매력은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 상승률과 풍부한 노동력이다. 필리핀 내 생산 가능 인구는 5933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60% 비중을 차지한다. 수도 마닐라 인근에도 일자리를 구하는 젊은 인력들로 넘쳐난다. 제조 기반이 취약하다 보니 안정적인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지난 2006년 이후 필리핀의 연평균 최저 임금 인상률은 3% 수준으로 물가 상승률을 하회하는 수준이다. 지난 10년간 최저 임금 총 상승률이 50%에 불과했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도 법제화돼 있다. 마닐라 인근 공단 작업자 임금은 월 300달러 수준인데, 보통 15일마다 지급한다.
원칙적으로 필리핀은 주 5일 노동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PEZA 등 국가에서 지정한 산업단지는 주 6일제 근무를 시행하고 있다. 시간 외 근무와 특별 근무 수당 부담도 적다. 평일 시간 외 근무 때 125%, 주말 근무시 130%를 각각 지급하고 있다. 베트남·인도네시아 등 아세안 국가들이 시간 외 근무수당을 200~300% 주도록 한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은 편이다.
노조 활동도 대체로 미약해 다른 아세안 국가에 비해 노사 분규 발생 빈도가 적다. 매년 노조에 의한 파업, 직장 폐쇄 비중은 전체 기업의 1% 수준에도 못미친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어 우리 기업 관리자들과 의사 소통이 자유롭고, 작업자 숙련도도 다른 아세안 국가에 비해 뒤처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관성 없는 정부 정책, 열악한 인프라, 복잡한 사업 인허가 절차, 늦은 행정 처리, 부정부패, 치안 문제 등은 필리핀 제조업 발전을 가로막는 고질적 문제로 지적된다. 작업자 결근율도 높아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외자 기업이 많다.
타성에 젖어 있고 동기 부여가 약한 것도 필리핀 작업자들의 단점으로 꼽힌다. 특히 일반 작업자와 달리 중간 관리자급 채용은 무척 어렵다. 대학을 나온 고급 인력은 졸업과 동시에 해외로 나가기 일쑤인 탓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원 교육에 많은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이정일 하이소닉필리핀 법인장은 “필리핀인들은 수동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무척 강하다”며 “직원 교육 프로그램으로 이들을 적극적이고 조직에 녹아들 수 있는 인재로 키우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라구나(필리핀)=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