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기시장, 국가 규격 따르느라 비인증제품에 주도권 내줄판

우리나라 전동기(전기모터) 업계가 시름하고 있다. 정부 규정에 따라 저효율 제품은 단종시키고 수백억원을 투입해 초고효율 제품을 내놨지만 정작 시장에선 외면 받는 상황이다.

정부가 제조사엔 규격 제품 생산·판매를 강제했지만 정작 소비자는 기준 이하 값싼 중국산 제품을 사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정책과 소비자 괴리가 작용했다. 한국산 제품이 시장에서 중국 제품에 밀리자 일부 기업은 재고소진을 이유로 규격 미달 제품까지 판매하는 데 이르렀다. 당국의 조치가 시급해졌다.

2015년 10월 에너지이용합리화법 효율등급제 시행이후 한 제조업체 창고에 프리미엄 전동기가 쌓여있다.
2015년 10월 에너지이용합리화법 효율등급제 시행이후 한 제조업체 창고에 프리미엄 전동기가 쌓여있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지난해 10월부터 출력량 37㎾ 이상 삼상유도 전동기에 대해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가 정한 프리미엄(IE3) 제품만 생산·판매하도록 에너지이용합리화법 효율등급제를 실시한 이후 효성·현대중공업 전동기 판매량이 20% 이상 줄었다.

펌프·팬·컴프레서·전기차 등에 사용되는 전동기는 우리나라 전체 전력소비량 46%를 차지하는 전력다소비 기기로 규정돼 있다. 정부는 당초 전력 부족에 따른 발전소 건설 회피와 온실효과 감축, 탄소배출권 거래 활성화를 위해 고효율 전동기 생산·판매를 단계적으로 유도해왔다. 국가 전역 전동기를 프리미엄 제품으로 교체해 원전 2기에 해당하는 4639Gwh 수준 전기를 절감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이에 2008년부터 국제기준인 일반효율(IE1), 고효율(IE2), 초고효율(IE3) 기준을 단계적으로 적용했다. 프리미엄 전동기는 에너지효율이 일반효율 전동기보다 7%, 고효율제품보다 2% 높다.

시중에 유통중인 중국산 저효율 전동기.
시중에 유통중인 중국산 저효율 전동기.

하지만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 제조사 조차 정상규격 제품을 판매하지 않는 실정이다. 소비자 역시 규격 이하 제품 구매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프리미엄 전동기 가격이 기존 동급 제품보다 30% 가량 비싼데다 중국과 저품질 국산 제품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제도 시행 이전에 생산된 제품 판매는 가능하지만 초고효율 제품 의무화에 따라 생산체계와 유통망을 전환한 업체 판매량이 줄어 들 수밖에 없다. 정상 제품을 판매하는 제조사와 유통업계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약 100억원을 투입해 초고효율 제품을 출시했고 잘 팔리던 제품까지 단종시켰지만 과거 제품보다 비싼 이유로 규격 이하 중국산, 한국산 제품 구매층만 늘었다”며 “제도 시행 후 판매량은 20~30% 줄었고 감소한 만큼 효율이 낮은 비규격 전동기가 유통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산이나 비규격 제품을 취급하지 않은 유통점 피해도 심각한 상황이다. 서울 구로 A사 대표는 “지난해 10월 제도 시행 후 가격 부담이 커져 거래처 발길이 뚝 끊겼다”며 “프리미엄 전동기를 사용하면 전기를 절감한다는 생각보다 당장 제품가격이 비싼 이유로 비정상 제품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 B사 대표는 “제도 시행 전인 8·9월 각각 143대, 112대 판매됐지만, 11월에는 98대로 줄었고 매달 20%가량 주는 추세”라며 “최근 중국 제품을 찾는 고객이 늘면서 비규격 중국 제품까지 취급해야하나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업계는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처럼 제조사뿐 아니라 유통점 단속을 통해 에너지소비 효율등급제도 정착을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2010년부터 전동기 초고효율제도를 시생하면서 제조사뿐 아니라 불시에 유통점을 단속해 적발되면 제품가격 수십배에 해당하는 과징금을 부여한다”며 “정부가 프리미엄 전동기 사용에 따른 에너지 절감효과를 제대로 알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엄정한 시장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에너지공단 관계자는 “중국산 제품이라 해서 규격에 맞지 않은 제품은 아니며 정기검사로 유통점 단속과 신고도 받고 있다”며 “최근 초고효율 제품을 판매하는 제조사와 유통점이 피해를 보는 만큼 지원제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태준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