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속도 조절

[데스크라인]속도 조절

'속도'는 상대 개념이다. 같은 속도라 해도 누군가에게는 빠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느리게 다가온다. 일반인은 100m를 10초대에만 뛰어도 빠르다고 여겨지지만 육상 선수에게는 대회에도 나가기 어려운 수준의 느린 속도다.

속도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순식간에 시속 100㎞에 도달하는 스포츠카는 200㎞ 넘는 속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속 100㎞에 최적화된 일반 승용차라면 200㎞ 이상은 무리다. 애써 그 속도로 달려도 운전자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힌다. 차량이 언제까지 견딜지도 미지수다. 속도는 습관·행태와도 연관된다. 느릿한 가락을 즐기던 어르신에게 무한대로 비트를 찍어 대는 전자음악(EDM)은 혼란을 일으키는 속도로 여겨진다. 늘 EDM을 듣는 이들에겐 즐거움을 주는 적당한 속도다.

야구에서 투수 체인지업이 통하는 것도 이와 연관됐다. 시속 150㎞ 속구를 던지다가 10~20㎞의 속도가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던지면 타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익숙하지 않은, 예상하지 못한 속도를 감당할 수 있는 타자는 드물다.

속도 조절이 필요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스포츠 경기에서는 이기기 위해, 도로에서는 원활한 교통 흐름을 위해 상황에 걸맞은 속도 조절이 요구된다. 속도가 너무 빨라도, 느려도 문제다. 체감 속도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사람가 수용할 수 있는 속도를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과 최저임금위원회 위원들이 올해 첫 전원회의에 앞서 진행된 신임 위원 위촉식에서 내년 최저임금 심의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자료:고용노동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과 최저임금위원회 위원들이 올해 첫 전원회의에 앞서 진행된 신임 위원 위촉식에서 내년 최저임금 심의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자료:고용노동부]

속도 조절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줄곧 화두였다. 2017년 탈원전 선언부터 그랬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중단 방침에 우려가 높아졌다. 공사 재개로 결정이 났지만 탈원전 공방은 현재진행형이다. 청와대는 60여년에 걸친 것으로 완만한 에너지전환이라고 설명했지만 다른 편에서는 급속도로 추진되는 탈원전으로 해석했다.

논란이 반복되는 최저임금 정책도 속도가 쟁점이다. 시간당 최저임금 인상률은 현 정부 출범 이후 2년 연속 10%대를 기록했다. 2020년 최저임금 1만원을 달성하겠다는 대통령선거 공약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은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두고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항변했다. 최저임금이 너무 빠르게 오른다는 것이다.

정부의 체감 속도는 현장과 달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인상률 결정 후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을 이룬다는 목표가 사실상 어려워졌다”면서 “대선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을 사과한다”고 밝혔다. 당초 계획한 만큼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끌어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위원회가 30일 새 위원장 체계 아래 2020년도 최저임금 심의를 시작했다. 경영계는 그동안의 인상 폭과 최근 어려운 경제 여건을 감안, 속도 조절을 요구하고 있다. 여당 일각에서도 속도 조절 목소리가 나온다. 노동계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속도 조절 여지를 주지 않으려 한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정부 출범 2주년 대담에서 “꽤 가파르게 인상됐다”며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두고 1년 전과 다른 입장을 냈다.

속도는 상대 개념이어서 바라보는 시각과 주변을 둘러싼 여건에 따라 바뀐다. 경제 상황이 달라졌다면 기준 속도 또한 수정하는 것이 맞다. 속도 조절을 위한 합리적인 판단이 요구된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에 몸을 맡기는 것은 모두에게 위험하다.

이호준 정치정책부 데스크 newleve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