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CVC 설립 문 열었지만 외부자금조달 제한...'반쪽짜리' 우려

업계 요청 지주 내 계열사 출자 봉쇄
펀드 조성시 40%만 외부자금 허용
"설립 검토" 대기업 집단 7곳 뿐
"지주 밖 CVC 유인책 적다" 지적

정부가 벤처생태계 활성화를 위해 지주사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제한적 보유방안을 내놨다. 일반지주회사의 설립을 허용하되, 펀드 조성시 외부자금조달 제한 등 규제를 달면서 '반쪽짜리 전략'이라는 논란도 지속될 전망이다.

대기업 대주주의 사익 편취를 막는다는 취지로 마련된 각종 규제 때문에 유명무실한 제도가 될 상황에 처했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실제 지주회사 68곳 가운데 대기업 7곳이 설립을 검토해보겠다고 답하는 데 그쳤다.

정부는 3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 겸 경제장관회의에서 일반지주회사의 CVC 소유를 허용하는 방안을 내놨다. 총수일가의 사익편취, 지주회사의 문어발식 계열사 확장을 방지하는 게 핵심이다.

[이슈분석]CVC 설립 문 열었지만 외부자금조달 제한...'반쪽짜리' 우려

◇외부자금조달 40% 미만

공정거래법을 개정해 추진하는 이번 방안에 따르면 정부는 우선 일반지주회사의 완전자회사인 벤처캐피털 설립을 허용키로 했다. 다만 업계에서 요청했던 지주 내 계열사 출자는 봉쇄됐다.

정진욱 공정거래위원회 기업집단국장은 “계열사 출자를 용인하게 되면 이중특혜를 줘야 한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밴처캐피털 형태는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창투사)'나 '신기술사업금융업자(신기사)' 두 가지 유형이 유지됐다. 자금을 빌리는 상한은 일반지주회사가 보유한 CVC는 자기자본의 200% 이내로 설정됐다. 업무 범위는 벤처투자 및 혁신금융 활성화라는 CVC 도입 취지를 고려해 '투자' 업무에 한정하고 여타 금융업무는 금지하기로 했다.

정부 관계자는 “신기사는 융자 업무, 타 금융업 겸업이 가능하다”면서 “반면에 일반지주회사 보유 CVC인 신기사의 경우 금지된다”고 설명했다.

CVC 펀드 조성시 조성액의 40% 범위 내에서 외부자금조달을 허용키로 했다. 타인자본을 이용한 대기업 지배력 확장을 방지하기 위한 공정위 조처다.

정 국장은 “외부자금조달 허용 비율을 50%도 가능하다고 봤지만 지주회사의 책임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40%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스타트업계는 외부자금 차입 가능성을 막는 것은 '반쪽짜리 CVC'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투자금지 대상도 설정됐다. 총수일가 사익편취 방지를 위해 소속 기업집단의 총수일가 지분 보유 기업에 대한 투자가 금지된다. CVC의 계열회사에 대한 투자도 불허된다.

아울러 대기업집단으로의 경제력 집중 방지를 위해 공시대상기업집단 및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 회사에 대한 투자도 불가하다.

한편 지주회사가 자기자금을 활용하거나 지주내 계열회사 자금 펀드 출자는 허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총수일가를 비롯해 계열회사 중 금융회사(일반지주회사 체제 밖 계열회사로 기업집단에 속하는 금융회사)의 출자는 금지하기로 했다.

투자의무는 소관법령에 따른다. 창투사는 벤처투자법에 따라 등록 후 3년 내 총자산(자기자본+조합 출자금)의 40% 이상을 창업·벤처기업 등에 투자해야 한다.

신기사는 여신전문금융업법에 따라 신기술사업자(신기술을 개발하거나 이를 응용하여 사업화하는 중소·중견기업)로 투자대상이 제한된다.

해외로 투자효과가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외 투자는 CVC 총자산의 20%로 제한하기로 했다. 투자를 받는 기업의 대기업 집단 편입 요건(CVC가 해당 기업의 지분 30% 이상을 소유하고 최다출자자인 경우 또는 해당 기업 경영에 대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우) 충족 시에는 유예기간을 기존 7년에서 10년으로 확대했다. 기존에 마련한 벤처지주회사와 동일한 조건이다.

◇68곳 지주회사 중 대기업 7곳 '검토'

공정위에 따르면 당국이 CVC 제한적 보유방안을 제시할 경우 CVC 설립을 검토할 것이냐는 조사에서 신호를 보낸 지주회사는 68곳 중 18곳이었다. 이 가운데 대기업 집단이 7곳을 차지했다.

문제는 중소·중견기업 등 총 일반지주사가 163곳에 달한다는 것이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실장은 “일반 지주사의 CVC 허용이 재벌만의 문제인 것처럼 인식돼있는데, 2019년 9월 기준 일반 지주사가 163곳이고 이 가운데 자산 총액 5조원 이상은 37곳뿐이다. 나머지 88%는 중소·중견기업으로 이 규제 완화가 재벌에 특화됐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특히 기업집단 내 일반지주회사가 있는 28곳 집단 중 4곳(롯데, CJ, 코오롱, IMM인베스트먼트) 집단은 지주체제 밖 계열사로 4곳의 국내 CVC를 보유하고 있고 일부 집단(SK, LG)은 해외법인 형태로 CVC 보유 중이다.

SK지주의 경우 일반지주회사 체제인 SK디스커버리로 전환 과정에서 20년간 보유하던 '인터베스트' 주식을 처분해 현재 해외계열사 100% 출자 방식으로 미국에 설립한 CVC SKTVC(SK텔레콤벤처캐피탈)을 운영하고 있다.

시장에선 “규제장치가 달린 제한적 보유방안으로 지주 밖 CVC를 안으로 끌어들인 유인점이 있느냐”는 지적도 있다.

정 국장은 “CVC를 지주밖 계열사에 두는 경우 재무적 투자에만 집중하게 된다는 분석이 있다”면서 “지주회사로 들어가면 전략적인 투자를 촉진하는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지주회사 체제에서의 세제 혜택도 있다고 덧붙였다.

◇기형적 벤처생태계, CVC 급물살

VC 규제완화 방안 논의는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위기 극복 대책으로 부상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정부는 지난 6월 하반기 경제 정책 방향을 공개하면서 CVC 규제 완화 방안에 방점을 놓았다.

논의에 불을 붙인 건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김 의원은 대표 발의와 동시에 지난 11일 CVC 허용 찬성 토론회를 열었다.

김병욱 민주당 의원은 “현재 시행 중인 인터넷은행도 대기업·재벌총수의 사금고화라는 우려와 달리 '핀테크' 기술과 접목한 금융혁신에 가깝게 발전하고 있다”며 “CVC도 인터넷은행과 마찬가지로 재벌들의 대출 지급보증을 제한하는 '행위 규제'만 제대로 하면 금산분리 취지를 살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벤처투자에서 CVC가 차지하는 비중도 미미한 실정이다.

미국은 51%, 일본은 44%이지만 한국은 9%에 그치고 있다. 실제로 올 1분기 벤처 투자액은 7463억원으로 작년 동기 대비 4% 줄었다. 벤처 투자액은 2013년 이후 매년 두 자릿수 성장해 왔는데 올 들어 7년 만에 처음으로 꺾였다.

모태펀드를 비롯해 정부 지원은 넘치지만 미국과 중국 등 벤처 강국과 비교했을 때 민간 자본 참여는 매우 저조하다. 창업은 매년 증가하는데도 기업가치가 1조원 이상인 유니콘 기업이 드문 이유다. 스타트업이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대규모 민간자본이 투입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공정위에 따르면 대기업 집단 일반지주회사 37곳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지난해 말 기준 약 25조원에 달한다.

일례로 지주회사 알파벳(구글의 모회사)이 지분을 100% 소유한 자회사인 구글벤처스 및 캐피털 지(Capital G)는 우버, 에어비앤비, 집라인 등 다수 벤처기업에 투자하고 있다.

미국 벤처캐피털 협회에 따르면 CVC가 지난해 미국의 전체 벤처캐피털 투자 건수의 24%, 금액의 47% 차지하기도 했다.

유재희기자 ryu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