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9>과학기술정보 메카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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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0월 23일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KORSTIC) 신청사 개청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을 비롯한 내빈들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9년 10월 23일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KORSTIC) 신청사 개청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을 비롯한 내빈들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미래를 내다본 포석이었다. 1962년 1월 1일.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이날 기획부 산하에 한국과학문헌센터(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를 설립했다. 한국 최초로 국내외 과학기술정보를 수집해서 제공하는 조직의 출범이었다. 인원은 전문위원 1명과 직원 3명 등 4명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3명은 신입이었다. 목표는 거창했지만 출발은 초라했다. 센터 설립은 정부가 아닌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주도했다. 당시 유네스코는 후진국 지원 사업의 하나로 과학문화센터 설립을 전 회원국에 권하고 이를 적극 지원했다.

1960년 5월 내한한 유네스코 아시아 지역 담당 G. 플로레스(Flores)가 과학문헌센터 설립 시 원조하겠다고 약속한 게 시발점이다. “한국이 과학문화센터를 설립할 경우 원조하겠습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그해 6월 10일 예비총회를 열고 과학문헌센터 설립을 의결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이어 10월 26일 제6차 자연과학분과위원회를 열고 5명으로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 윤일선 서울대 총장, 고문 김명선 연세대 부총장, 문헌책임위원 최희창 연세대 이공대학장, 기획책임위원 최기철 서울대 사범대 교수, 위원 장내원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국장 등이다.

정부도 과학문헌센터 설립을 지원했다. 유네스코본부에 과학문헌센터 설립을 위한 원조와 전문가 파견을 정식 요청했다. 국고 보조금 2178만원을 지원했다. 1962년 3월 센터 출범의 산파역을 한 윤일선 서울대 총장이 센터 위원장에 취임하면서 면모 일신에 나섰다. 그해 5월 기관 명칭을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KORSTIC)로 개칭했다. 센터 운영에 관한 협의를 위해 학계와 관계 인사 12명으로 전문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센터를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산하 조직에서 독립시키기로 의결하고 그해 5월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설립 규정을 제정했다. 규정에 따라 센터 업무 범위를 △국내외 과학기술 관계 전문서적, 정기간행물, 논문 수집 △국내외 특허 자료 수집, 정부 출판물 수집, 기타 통계 자료 수집 △과학기술 문헌 특허 속보와 외국 특허분류 등 간행물 발간, 수요자들에게 자료 복사, 번역 서비스 등으로 정했다. 또 업무 분장을 위해 총무과, 기획과, 정보과, 자료과, 사업과를 두기로 했다.

1963년 센터는 자료 개발과 수요 개발 인력을 추가로 채용했고, 기존 소형 오프셋 인쇄기 외에 마이크로필름 카메라와 복사 시설을 도입해 그해 9월부터 가동했다. 또 외국 과학기술 월간지와 정기간행물, 세계 각 대학 연구소 연구논문 등을 수집해 국내 대학과 연구단체·개인 등을 대상으로 간행물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센터는 1200여종에 이르는 외국 과학기술 정기간행물과 외국 논문을 수집해 이를 과학·의학·농학·공학·원자력 등 주제별로 분류해 묶은 '과학기술문헌목록집', 국내 첫 특허 관련 간행물인 '외국특허 목록집'도 펴냈다.

센터는 사단법인체로 출범하기 위해 1964년 2월 15일 창립총회를 개최해서 정관을 심의하고 이사, 감사 등을 선출했다. 그해 2월 25일 열린 제1차 이사회에서 회장에 물리학자인 권영대 서울대 교수, 부회장에 최기철 서울시 교수를 선임하고 사무총장에 오익상씨를 인준했다. 그해 2월 29일 사단법인체로 전환한 센터는 조직을 기획실, 총무실, 문헌부, 업무부 등 2실 2부 체제로 확대 개편했다.

1966년 8월에는 1945년부터 20년 동안 국내외 학술잡지나 연구보고서, 논문집 등에 실린 국내 과학자 논문 1만664편을 수록한 '한국과학자업적목록'을 영문으로 발간했다. 1967년 7월 개최한 임시총회에서 센터를 재단법인체로 전환키로 의결했다. 그해 8월 8일 김기형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재단법인 이사장과 임원 취임식을 거행했다. 이사장에 최동락 농촌진흥청 차장이 취임했고 이사로 손응룡 고려대 교수, 김병희 동국대 산업대학원장, 육종철 한양대 교수, 우형주 서울대 교수 등 8명을 선임했다.

1968년 8월 29일 센터는 긴급 이사회를 열고 당시 정권 실세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후락 전 청와대비서실장을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이사진도 신동식 청와대 경제2수석비서관, 박두병 대한상공회의소장, 김홍기 대한이비인후과 학회장,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 이량 서울대 공대학장, 이재철 과학기술처 차관 등을 새로 선임했다. 또 신임 사무국장에 김두홍 신라대 교수를 임명했다.

정부는 그해 12월 28일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육성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동안 센터는 출범 이후 국고 보조금에 의존해 운영했다. 이에 따라 법률로 국가 재정 지원을 보장받기 위해 육성법 제정을 추진했다. 국회는 1969년 4월 29일 제69회 본회의를 열고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육성법안을 처리했다.

이날 오전 11시 35분 국회 본회의장.

◇장경순 국회 부의장=의사 일정에 따라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육성법안을 상정합니다. 법제사법위원회 김우영 위원장대리 나오셔서 심사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우영 의원=이 법안은 정부가 발의해서 위원회로 회부한 법안입니다. 그동안 과학기술처 장관의 제안 설명과 전문위원의 예비 심사보고, 질의와 토론을 거쳐 기존 원안에 일부 수정해 의결했습니다. 이 법안의 골자는 선진 각국의 과학기술 정보를 제때 수집해 과학기술 연구개발 촉진과 중복 연구 방지 등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센터를 육성하고 지원하자는 것입니다. 수정 의결한 주요 내용은 센터 건설비와 운영에 필요한 기금 충당을 위해 출연금을 정부가 지급할 수 있게 규정했습니다. 정부기관이나 국·공립 교육기관, 연구기관이 발간하는 과학기술에 관한 조사서와 보고서, 논문 등 자료를 센터에 기증하며, 센터 사업계획은 주무부처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했습니다. 위원회에서는 수정안을 여야 전원일치로 의결했습니다. 본회의에서도 만장일치로 가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경순 부의장=이의 없으시면 원안대로 통과시키겠습니다. (의원들 “이의 없습니다.”) 그럼 통과를 선포합니다.

법안 통과로 센터는 도약의 디딤돌을 마련했다. 센터는 그해 10월 조직을 새롭게 정비했다. 사무국장제를 폐지하고 사무총장제를 도입했다. 초대 사무총장에는 '아폴로 박사'로 유명한 조경철 박사가 취임했다. 해외 유치 과학자 1호 조경철 박사는 연세대 교수와 경희대 부총장, 한국천문학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강원 화천군은 그를 기리기 위해 2014년 10월 광덕산에 '조경철전문대'를 건립, 운영하고 있다.

1969년 10월 23일. 센터는 이날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에 새 청사를 완공하고 준공식을 가졌다.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방명록에 '축 한국과학정보센터 준공'이라는 글을 남겼다. 센터는 1970년 2월 서비스 전담부서를 신설했다. 1974년 1월 기술상담소를 설치해 운영했고 1975년 7월 국내 처음 컴퓨터를 이용한 정보검색 서비스를 제공했다. 1978년 12월 20일 온라인 대화식 검색시스템을 가동, 온라인 정보검색 시대를 열었다.

센터는 이후 독보적인 국내 과학기술 정보제공 기관으로 위상을 확립했지만 1980년대 이후 조직 통합과 분리를 오가며 부침(浮沈)을 거듭했다. 1981년 9월 17일 상공부는 한국산업경제기술연구원(KIET) 설립 관계회의를 열고 센터와 국제경제연구원 통합을 의결했다. 두 기관을 통합한 KIET가 1982년 1월 11일 출범했다. KIET는 1984년 8월 8일 명칭을 산업연구원으로 변경했다. 연구원은 1988년 5월 20일 이사회 의결을 거쳐 부설 산업기술정보센터를 개소했다. 초대 소장에는 박홍식 특허청장이 취임했다. 1991년 1월 23일 센터는 산업연구원에서 독립해 산업기술정보원으로 출범했다.

정부는 1993년 5월 과학기술 정보 수집과 가공, 유통을 총괄하는 연구개발정보센터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설로 발족했다. 소장에는 한국컴퓨터산업의 산증인인 성기수 동명대 총장이 취임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미국 유학을 떠나 세계 명문인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2년 1개월 만에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기록은 하버드대 300년 역사에 신화로 남아 있다.

센터는 1999년 5월 국무총리실 산하 공공기술연구회 소속기관으로 바뀌면서 독립법인으로 승격했다. 그해 9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슈퍼컴퓨팅센터를 인수했다. 2000년 2월 공공기술연구회 이사회 결정에 따라 기술정보원과 정보센터는 2001년 1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으로 출범했다. 초대 원장에는 조영화 정보센터소장(성균관대 석좌교수)이 취임했다. “센터 소장 재임 중 통합을 마무리하고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질적인 두 기관을 통합하고 미래 비전을 제시해 이용자 중심의 기관으로 육성하기 위해 직원들과 함께 노력했습니다.”

초대에 이어 2대 원장으로 재임하면서 KISTI를 과학기술정보 메카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KISTI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기관이다. 원장은 KISTI에서 30년 동안 근무한 김재수 박사다. 3월 제8대 원장에 취임한 그는 KISTI 내 요직을 다 거쳤고, 한국기술혁신학회장도 지냈다. KISTI는 산하에 개방형 데이터융합연구단과 지능형인프라기술연구단을 비롯해 국가과학기술데이터본부, 국가슈퍼컴퓨팅본부, 데이터분석본부와 과학데이터스쿨, 대외협력실, 기획부, 경영지원부 등을 두고 있다. 한민족과학기술자 네트워크도 운영하고 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