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조선왕조 '데자뷔'

[데스크라인] 조선왕조 '데자뷔'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절했다. 얼어붙은 땅에 마구 찍어서 이마에 피가 흘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상(임금)이 삼궤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禮)를 행하였다”라고 짧게 언급할 뿐이다. 세세한 장면은 묘사하지 않았다. '삼전도의 굴욕'이다. 한낱 변방 오랑캐라며 무시한 여진족에게 만인지상의 임금이 머리를 숙이고 항복했다. 1만명이 넘는 청년이 포로로 끌려가며 혈육과 생이별했다.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왕과 신하가 자초한 조선왕조의 최대 치욕이었다.

역사는 반복될까. 대한민국은 다시 기로에 섰다. 400년 전 청과 명 사이에 낀 조선의 처지와 흡사하다. 미국은 '칩4 동맹'에 속히 들어오라고 보챈다. 중국은 등을 돌리면 보복하겠다고 위협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호사가들은 종종 말한다. 중립 외교를 표방한 광해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잃지 않았다면 병자호란·정유재란과 같은 참혹한 국난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래서일까. 그동안 우리 정부는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모호한 전략으로 버텨 왔다. 광해가 명과 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 것과 같았다.

정세는 급변했다. '우리 편이냐 남의 편이냐'의 양자 선택을 요구한다. 미국은 '칩4 동맹'의 합류 가부를 알려달라고 최후 통첩했다. 총 대신 반도체로 싸우는 신냉전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는 형국이다. 우리의 선택이 병자호란과 같은 후과로 돌아오지 않을까 두렵다.

조선왕 가운데 인조와 대척점에 세종이 있다. 세종은 오히려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방 4군6진을 개척했다. 북벌의 시초가 된 '파저강 정벌'은 길이 빛나는 대승이었다. 아군 사상자가 4명에 불과했다. 세종은 “최윤덕이 파저강을 정벌한 것은 대마도 정벌에 비해 그 공이 갑절이나 된다”고 격찬했다.

패군과 성군을 가른 것은 '정세를 읽는 힘'이었다. 친명사대론의 반정공신에 둘러싸인 인조는 조선 안팎의 정세를 객관적으로 읽는 데 실패했다. 반면에 세종은 '파저강 정벌'을 앞두고 장장 5개월여 동안 신료들과 대책을 마련했다. 문무대신은 물론 전문가와 일반인, 심지어 국왕까지 참여하는 등 수평·수직으로 소통했다. '정벌 작전' 하나하나의 시나리오를 점검했고, 그 시나리오가 척척 맞아떨어졌다.

400년 전과 판박이 상황에서 우리 정부엔 '정세를 읽는 힘'이 있는가. 몇 가지 시그널은 좋지 않다. 외교라인에서 '칩4 동맹' 예비회담 참가를 통보했으나 산업정책 쪽 참모들은 언론에 보도된 뒤에야 알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한국 전기차 보조금 삭감 내용이 담기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논란도 뜨겁다. IRA 대책 마련에 주무 부처를 두고도 부처 간 신경전이 펼쳐진다.

아군과 적군이 혼미한 복마전 양상이다. 애플은 미국 정부가 반중 정책을 밀어붙이는 와중에도 아이폰용 낸드플래시 세 번째 공급자로 중국 창장메모리(YMTC)를 선정했다. 미국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보다 중국 내 아이폰 판매라는 실익을 택했다. 미국 정부는 다른 나라의 중국 사업은 막으면서도 자국 기업의 중국 지원은 모른 체 한다. 중국도 반격에 나섰다. 중국 반도체 설계자동화(EDA) 툴 업체들이 제품을 한국기업에 거의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정세를 정확하게 읽는 힘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대통령부터 관료·전문가·기업인까지 벽을 허물고 옆으로, 아래로 소통해야 한다. 세세한 부분까지 예측하고, 시나리오를 짜야 한다. 지금처럼 외교안보·산업경제 부처별로 사분오열되면 백전백패다. 인조가 아닌 세종의 길로 가야 한다.

[데스크라인] 조선왕조 '데자뷔'

장지영 부국장 jyaj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