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기초과학연구원과 노벨상

민경찬 연세대 명예교수(과실연 명예대표)
민경찬 연세대 명예교수(과실연 명예대표)

매년 10월 초순이 되면 노벨상 계절이 돌아온다. 올해도 지난 3일부터 생리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이 연이어 발표됐다. 그러나 우리 한국 과학자의 수상 소식이 들리지 않아 아쉬웠다. 그런데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예년과 달라진 것 같다. 이번에는 수상자 발표 후 '우리 과학계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타성 보도가 반복되지 않았다. 언론은 주로 수상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 노벨과학상의 의미를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 보도했다. 더 나아가 노벨상 수상은 기초과학 연구를 중시하고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가능함을 강조한 것이 고무적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10여년에 걸쳐 기초연구 예산을 크게 늘려 왔으며, 2011년에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을 설립하는 등 미국·유럽·일본 등 기초과학 강국의 경쟁력에 적극 도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IBS는 새로운 발견을 위한 근원적이고 도전적인 연구 수행을 목표로 기초과학 연구자의 장기·안정적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됐다. 독창적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수월성·창의성·자율성·개방성'을 철학으로 내세웠으며, 연구 자율성 보장과 안정적 연구비 지원을 토대로 인류에 기여하는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네이처는 IBS를 '세계 100대 떠오르는 별(2016년)' 가운데 11위(국내 1위), 논문 질적 우수성을 세계 정부연구소 가운데 17위(2020년)로 평가하는 등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연구기관들과 비견할 수 있는 경쟁력을 인정하기도 했다. 설립 후 10여년이 지나면서 대학이나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달성하기 어려운 독창적 시도와 성과가 늘고 있으며, 우리 미래를 크게 바꿀 만한 연구도 눈에 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 세계 최초로 코로나바이러스 고해상도 유전자 지도를 완성한 것은 IBS의 리보핵산(RNA) 연구단이었다. 바이러스 샘플 확보 2개월도 안 돼 논문을 발표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첨단 분석 장비를 갖추고 인재를 모아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mRNA 백신이 11개월 만에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된 것도 15년 전부터 인공 RNA를 연구한 과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학에는 준비와 축적이 필요하다. IBS를 설립하면서 벤치마킹한 독일 막스플랑크연구회(MPG)와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를 살펴보면 IBS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다. 이 두 기관은 장기·대형·집단 연구를 추구하며 대학이나 출연연이 하기 어려운, 자연 현상의 근원을 탐구하는 기초과학 연구에 초점을 두고 있다. MPG는 36명, RIKEN은 9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각각 독일 노벨과학상 수상자 88명의 41%, 일본 수상자 25명의 36%에 해당한다.

MPG와 RIKEN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먼저 연구 지원에 대한 철학이다. 뛰어난 연구자를 찾아내 원하는 대로 연구에만 집중하도록 지원하는 '하르나크 원칙'이다. 다른 하나는 이들 기관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두 기관의 역사는 MPG 1911년, RIKEN 1917년 설립 등 100년이 넘었다.

MPG와 RIKEN은 노벨상 수상을 목표로 연구자를 지원한 것이 아니다. 연구자가 성취한 결과가 노벨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기대와 지원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기초과학 연구에서는 구체적인 목표를 요구하고, 이에 대한 성과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2013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랜디 셰크먼 교수는 “연구자에게 특정한 방향을 정하지 않고 지원해야 혁신적 발견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7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는 “연구자들이 단기 목적의 연구가 아니라 즐겁게 장기적인 큰 프로젝트를 할 만한 여유롭고 안정적 환경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했다. IBS가 MPG와 RIKEN처럼 국민 삶의 질과 지속 가능한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하는 혁신적인 연구를 이루길 바란다면 장기적 흐름에서 지원하고 평가해야 한다. 노벨과학상은 연구 성과를 얻어 수상하게 되기까지 평균 30년 이상 걸린다.

지난 5일 강원도 정선 철광 지하 1000m 아래에 역사적인 지하 실험 시설이 준공됐다. 우주의 비밀을 밝힐 암흑물질과 중성미자를 탐구하는 'IBS 예미랩'이다. 준공까지 많은 시간과 지원이 필요했다. 필자는 이날 지하 실험 현장을 둘러보면서 세계 물리학 역사를 바꿀 위대한 발견이 이곳에서 나올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됐다. 물론 안정적이고 장기적 지원은 필수 조건이다.

민경찬 연세대 명예교수(과실연 명예대표) kcmin@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