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391〉라디크스를 떠올리며

라디칼(Radical). 사전은 '급진적인', '과격한'으로 번역한다. 원래 '뿌리'를 뜻하는 라틴어 라디크스(radix)에서 왔다고 한다. 그런 만큼 '기본적인', '필수적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극단적', '혁명적'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 현대 사전에도 이런 흔적이 남아있다. 어느 사전은 첫 의미로 '근본적인'을 제시한다.

혁신에는 어떤 유형이 있을까. 뭐든 가치 있는 것이라면 그걸로 충분할 수 있겠다. 하지만, 뭔가를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의 경계를 정해둘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모든 걸 할 수 없다면 어떤 것에 집중해야만 하는 탓이다.

그리고 혁신을 격자에 넣어 나눈 구분 중 라디칼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학자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라는 점에서 급진적 혁신이란 분류기호를 달았다. 많은 기업은 이 방식을 거리 먼 뭔가로 여긴다. 마치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모비딕'에 등장하는 에이허브 선장이나 퀴퀘그를 보는 듯 말이다. 과연 그럴까.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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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칼 혁신을 말할 때 예로 드는 게 제약산업이다. 원래 제약기업 핵심 기술은 합성화학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유전공학과 생명공학 기술이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배적 기술이 된다. 물론 합성화학에 익숙했던 기존 제약기업에 그야말로 급진적 혁신을 요구한 셈이다.

하지만, 분자생물학을 다루던 연구실 입장에서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거기다 고수익을 기대하는 모험투자가의 비즈니스모델에도 들어맞는 셈이었다. 즉, 라디칼은 생각의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상대적 개념인 셈이다.

제록스는 복사기란 카테고리를 만든 기업이다. 제록스가 난관에 부딪힌다. 저가 복사기 시장은 일본 기업이 잠식해 오고 있었다. 새로 내놓은 신형 복사기에는 수리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다. 대부분 수리 요구는 심각한 결함이 아니었다. 엔지니어들이 예상했던 문제였고, 복사기에 뜨는 고장 번호를 보고 사용설명서를 찾아보면 될 일들이었다. 문제는 누구도 사용설명서를 보려 하지 않았고, 누구 책상 서랍에 들어갔는 지 사라져버리고 없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소한 문제에 해결 방법이 쉽지 않은 것이었다. 복사기 설계에 큰 오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회의를 앞둔 누군가가 사용설명서를 뒤져주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조금 뒤집어 보기로 한다. 우선 복사기란 고장이 나기 마련이라고 전제하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고장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는 질문에 집중하게 됐다. 그렇다면 사용설명서 대신 어디가 고장이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설명할 수 있을까.

제록스는 1982년 신형 10시리즈 복사기를 내놓는다. 고장나면 복사기의 액정표시장치(LCD)에는 고장 위치와 어떻게 해야할 지를 표시했다. 여기엔 제록스가 갖고 있던 그래픽 인터페이스 기술을 적용했다. 10시리즈는 제록스는 명성을 되찾게 했을 뿐 아니라 미국 제품으론 최초로 일본 굿 디자인 상도 수상한다.

많은 기업은 라디칼 방식이라는 데 과잉 반응을 보인다. 당장 도움 안될 일이라는 듯 반응한다. 하지만 실상 그렇지 않을 지 모른다. 왜냐하면 뭔가를 엄청난 걸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여태껏 당연하다고 여겼던 생각의 뿌리에서 다시 시작해 보라는 것이라면 말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라디칼이라고 읽되 라디크스를 떠올리는 것 말이다. 관행의 뿌리에서 시작하는 혁신 말이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