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경의 SF 프로토타이핑] 중국·미국 숏폼드라마의 성장과 한국의 도전](https://img.etnews.com/news/article/2025/01/15/news-p.v1.20250115.68095f4f084744d1927aec45b0c02eab_P1.png)
최근 중국과 미국의 숏폼드라마 시장이 눈부신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폭발적인 관심을 얻고 있는 이 새로운 영상 포맷은, 짧은 시간 안에 강렬한 스토리를 담아내는 매력으로 전 세계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아직 한국은 이 분야의 후발주자로 평가받지만, 초기 웹툰·웹소설 시장이 그랬듯이 새로운 콘텐츠 포맷이 가져다줄 기회를 기대하는 분위기입니다. 실제로 조금씩 웰메이드 작품들이 선보이는 추세이며, 향후 다양한 소재가 숏폼드라마로 제작될 가능성도 높습니다. 특히 SF 장르의 높은 활용도가 주목할 만한데, 기술과 인문학적 통찰을 결합한 스토리가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도 큰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SF 인기작들을 통해 본 동양철학과 인간 내면의 스토리텔링
이러한 숏폼드라마 트렌드 속에서 주목해야 할 한 축은, 동양철학과 인간 내면을 다루는 SF 콘텐츠가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 내면에 대한 물음'라는 근본적 질문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대표적인 SF영화 사례를 통해, 서구적 과학기술과 동양철학의 만남이 어떻게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과학기술과 동양철학의 만남-
최근 아카데미상 7관왕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단순한 SF영화를 넘어서 현대 사회의 본질적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이 작품은 멀티버스라는 SF적 장치를 통해 현대인이 직면한 '선택 과잉'의 문제를 독창적으로 조명합니다.
세대 간 단절과 가치관의 충돌
영화의 중심에는 중국계 이민자 가정의 모녀 갈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딸 조이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무한한 자유 속에서 역설적으로 실존적 허무를 경험합니다. 끊임없는 SNS의 자극, 무한한 진로 선택지, 끝없는 자기계발의 요구는 오히려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반면 세탁소를 운영하는 어머니 에블린은 현실적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기성세대를 상징합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되지 않느냐”는 그녀의 말은, 무한한 선택지 앞에서 방황하는 딸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 간 단절을 보여줍니다. “열심히 살면 성공한다”는 전통적 가치관과, “너무 많은 선택지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현대의 딜레마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입니다.
양자중첩과 실존적 불안의 메타포
영화는 양자역학의 중첩 개념을 현대인의 정체성 문제와 교묘하게 연결합니다. 양자중첩이론이 말하는 '동시에 여러 상태가 공존하는 현상' 즉 멀티버스는 무한한 가능성 앞에 선 현대인의 모습과 닮아있습니다. 조이가 겪는 실존적 불안은 바로 이 '중첩된 상태'가 주는 불확실성에서 비롯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에블린의 캐릭터 아크입니다. 그녀는 “잘 된 게 하나도 없는”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실패'야말로 그녀가 다른 우주의 무한한 가능성(가수, 요리사, 무술가 등)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이는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동양철학의 핵심 사상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관측의 의미와 사랑의 힘
양자역학에서 '관측'이 중첩된 상태를 하나의 확정된 현실로 만드는 것처럼, 이야기도 카오스적 현실에서 정리된 코스모스로 향합니다.
영화에서는 에블린의 모성적 사랑과 선택이 이러한 '관측자'의 역할을 합니다. “내 딸을 구하겠다”는 에블린이 가족이라는 관계를 “관측”해주고 선택해줌으로써, 조이의 무수한 중첩 가능성이 “의미 있는 결론”으로 모여드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죠.
에블린은 평행우주를 넘나들며 딸의 고통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며 공감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조이 역시 자신의 실존적 불안이 단순한 개인의 결함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 앞에 선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주는 혼돈(카오스) 속에서도,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이미 고유한 의미와 가치가 잠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잠재된 의미를 관측, 즉 현실화하는 힘은 바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SF프로토타이핑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우리의 앞에는 수많은 발전 가능성이 동시에 펼쳐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한한 가능성을 어떻게 의미 있게 활용할 것인가는, 결국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2. 「매트릭스(The Matrix)」: 가상의 굴레와 깨어남의 미학
“현실이란 무엇인가?”, “참된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서구철학의 이원론을 동양 사상의 일원론적 깨달음과 교차시킨 작품입니다. 주인공 네오가 가상의 세계를 인식하고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동양적 관점에서 '깨달음'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3.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정체성과 인공지능의 경계
불교의 무아(無我): 기억이나 육체는 자아의 본질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복제인간의 삶과 갈망: 복제인간들의 '삶'에 대한 갈망은 과연 인간과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제기합니다.
동양철학의 적용: 인간과 구분하기 힘든 '의식'을 가진 AI에게, 동양철학의 “만물이 본래 한 몸”이라는 관념을 적용할 수 있을지 사유하게 만듭니다.
4. 「허(Her)」: 사랑, 감정, 그리고 인공지능의 연대
'외적 실체'보다 '내적 관계'가 중요한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AI가 인간과 감정적 교류를 하게 되면서, 동양적 “마음의 작용” 철학이 현대 기술 발전과 마주하게 됩니다. 결국 진정 중요한 것은 물리적 실체가 아닌, 서로 연결되고 공감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관계' 그 자체라는 것이죠.
과학기술과 동양철학의 접점, 그리고 미래 방향성위 작품들을 통해 알 수 있듯, 과학기술이 고도화될수록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진정한 삶의 의미인가?'라는 인간 내면에 대한 질문이 점점 부각되고 있습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양자역학의 '관측자 효과'와 '불확정성'을, 그리고 동양철학의 '비움'과 '수용'을 절묘하게 연결시키며,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생기는 실존적 불안을 치유하는 열쇠가 오히려 '타인을 향한 사랑'과 '자신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태도'임을 일깨워줍니다. 이는 서구의 과학적 세계관과 동양철학의 통찰이 만나는 지점으로, 앞으로도 숏폼드라마 등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에서 더욱 강력한 스토리텔링 자원으로 활용될 것입니다.
결국, 숏폼이든 장편영화든,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그리는 SF 프로토타이핑 장르는 동양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적 성찰과 결합했을 때 가장 큰 시너지를 발휘합니다. 앞으로 한국이 숏폼드라마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심층적 내면 탐구와 스토리텔링이 결합된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필자소개/ 윤여경
문화기획자이자 비영리 문학단체 퓨쳐리안 대표, SF 스토리텔러. 2017년 '세 개의 시간'으로 제3회 한낙원과학소설상을 수상했다. 2023년 제6회 CISFC 과학소설 국제교류 공로 훈장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금속의 관능', SF 앤솔러지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 '우주의 집' '끝내 비명은', '매니페스토', 장르 창작법 앤솔러지 '장르의 장르', 장편소설 '내 첫사랑은 가상 아이돌' 등이 있다. 한·중·일 아시아 설화 SF 프로젝트 '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밤'을 기획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예술적 환경을 제공하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작가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